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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왕국 전체를 비극으로 물들이다
by Glen Scrivener2021-07-30

죄는 널리 퍼져 나가면서 드러나기 마련이고, 그 결과 다른 곳으로까지 전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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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신실함(integrity)과 동의어였다. 그는 왕국의 차기 큰 인물이었고, 메시아적 용어로까지 언급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역겨운 성범죄자였다.


우리는 지금 사무엘하 13장에서 자신의 이복누이인 다말을 강간한 다윗의 아들이자 이스라엘의 황태자인 암논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은 단지 암논만을 논하는 게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악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나아가서 희생자를 침묵시키고, 범죄 자체를 덮어 버리기 위해서는 부패한 시스템 전체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황폐할 대로 황폐해진 다말이라는 결과는 사악한 기회주의자 암논뿐 아니라, 악마적인 조언자 요나답, 무력한 왕 다윗, 그리고 비겁한 형제 압살롬까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 모두가 다 당시의 왜곡된 생태계를 만들거나 유지하는 데에 일조했다. 


주인공 만나기


암논, 신실한 자


암논이라는 이름의 뜻은 “신실한”(faithful)이다. 그의 사랑은 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바로 이 사실은 앞으로 닥칠 이야기에서 모든 상황이 엉망이 될 것을 암시하는 첫 번째 단서이다. 그는 자신을 로맨티스트라고 생각한다. 2절은 그가 다말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구절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대신 다말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암논은 괴로워한다. 그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지 몰라도, 그의 “사랑”이 찾은 종착점은 강간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음 구절이다.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15절).

 

“다윗의 아들”은 메시아적 인물을 의미한다(참조, 삼하 7:12-26; 마 21:9). 이제 암논은 도리어 적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아예 제 기능을 상실한 왕국에서 기생하던 몇몇 구성원들이 없었다면 애초에 이런 죄악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자, 몇 가지를 살펴보자.


요나답, 지혜로운 자


암논의 고문 요나답이 없었다면 암논의 악은 단지 사악한 환상으로 끝났을 것이다. 요나답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뱀처럼 “간교한” 자로 소개된다. 요나답은 미끄러지듯 등장하더니 금지된 것을 하라고 제안한다. 이런 사실 역시 그의 이름을 배반하는 행위이다. 요나답이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주신다”이다. 그러나 뭔가를 주기 위해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을 사용하는 반면, 요나답은 “왕의 아들”이라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4-5절). 이런 취함은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선악과를 취함과 비슷하고, 다윗이 금지된 밧세바를 취함과 같다(삼하 11장). 다윗의 경우, 왕으로서 보호해야 하는 책임을 포기하고 대신 연약한 여성을 착취했으며, 그 결과 그의 왕국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죄는 널리 퍼져 나가면서 드러나기 마련이고, 그 결과 다른 곳으로까지 전이된다. 요나답의 단순한 조언은 결과적으로 다말의 파괴, 암논과 압살롬의 죽음, 그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다윗의 슬픔, 나아가서 내전과 분열된 왕국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다말, 바른 자


그녀의 이름이 가진 뜻은 “야자수”이다. 야자수에서 떠올리는 이미지는 우아함, 열매 맺음, 그리고 올바름이다. 그녀는 이 비극적인 이야기 속에서 그나마 어떤 미덕을 증명하는 유일한 사람이지만, 끔찍하게도 그 미덕은 그녀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만다. 그녀는 능숙한 요리사이자 정이 많은 누이였기 때문에 요나답의 조언에 따라 암논이 병에 걸린 척하자 자연스럽게 암논의 침실로 유인된다. 그곳에서 암논은 그녀를 붙잡고 말한다. “나의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11절).


여기에 우리는 현재 외상성 성애화(traumatic sexualization)라고 부르는 것을 만난다. ‘나의 누이야’라는 호칭은 그들의 순수한 관계를 보여준다. ‘나와 동침하자’는 그 관계의 왜곡을 드러낸다. 다말은 암논을 설득하려고 여섯 번이나 시도한다(12-13절). 사실 “싫어”라는 한 마디로 충분해야 한다. 그러나 14절은 그 결과를 공포스럽게 묘사한다.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그와 동침하니라.”


하지만 다말의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암논은 그녀가 세울 수 있는 모든 장벽을 부수고 난 이후, 그는 그녀를 내침으로서 그녀를 다시 학대한다(15-18절). 버림을 받은 다말은 애통하고 황폐하며 더럽혀졌다(19절). 키가 큰 야자수는 이제 쓰러지고 열매하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다. 상황은 그녀를 계속해서 힘들게 한다. 이제 그녀의 친오빠 압살롬이 나올 때가 되었다. 


압살롬, 평화의 사도


그의 이름의 뜻은 “평화의 아버지”이다. 그러나 압살롬이 추구한 평화는 성경의 샬롬을 패러디한 것이다. 먼저 그는 슬픔에 잠긴 누이를 진정시켰다. “네 오라버니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그는 네 오라버니이니 누이야 지금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라”(20절).


성령님은 그 사건을 강간이라고 부르지만(14절), 압살롬은 “함께 있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는 다말이 오빠로 부터 강간당한 사실에 더 끔찍해하기 보다는 그래도 오빠니까 다행이지 않냐는 식으로 안정되도록 만든다. 이것은 이런 사건이 벌어질 때면 가족이라는 카드를 쓰는 남자들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하나같이 상황을 최소화하고 조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압살롬이 가져온 거짓 평화이다. 은폐가 주는 “평화와 고요”는 이 장 후반부에 가면 억지로 만들어낸 거짓 평화임이 드러난다(23-29절). 그는 문제를 빛으로 가져오기보다는 어둠 속에서 그 문제를 “관리”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므로 압살롬은 자신에게 불리할 때에는 침묵하고 또 침묵을 강요하지만, 때를 만나면 거친 폭력도 서슴치 않는다. 


다윗, 위대한 자


21절에서 우리는 그러한 악이 불러일으키는 반응을 본다.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화를 내는 건, 전적으로 맞다. 문제는 화를 내는 게 다윗이 한 모든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딸에게 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암논과 맞서지도 않았다. 게다가 요나답을 추방한 것도 아니다. 그는 압살롬과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밧세바에게 지은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지금 그이 모습에서 드러나고 있다. 바로 무력함이다. 만일 다윗이 사무엘하 11장에서 그렇게 치명적인 죄를 짓지만 않았더라면, 그가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이런 식의 악에 당당하게 맞섰을 것이다. 그러나 다말의 아버지인 다윗 왕은 악에 대해 수동적이기 그지 없다. 


그럼 우리는?


현대의 성적 스캔들에 주의를 돌릴 때 적용할 점은 분명하다. 썩은 사과 하나에 해당하는 암논을 찾아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악의 ‘마을’ 전체를 살펴봐야 한다. 다말을 보호하고 싶다면, 우리 안에 잠재하고 있는 악한 본능에 대해 똑바로 알아야 한다. 그 양상은 많고도 다양할 것이다. 


우리가 암논이 아닐지 모르지만 얼마든지 암논을 도울 수 있다. 어떤 악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얼마든지 “문제”를 “관리”하면서 은폐에 협력할 수 있다. 우리의 의도를 전적으로 명예로운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의심할 여지없이 압살롬은 자신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그런 와중에 스스로 행하는 역할과 또한 그로 인해 초래하는 피해를 보지 못하는 장님으로 남을 수도 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탐구적이어야 하고, 그에 대한 대답은 어려워야 하며, 또한 회개는 진심에서 우러나야만 한다. 사무엘하 13장이 우리의 선생이라면, 학대에 대처하는 바른 태도는 모든 종류의 악, 즉 밖에 있는 악뿐 아니라 내 안에 숨어있는 악에까지도 맞서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이런 악은 얼마든지 다른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그래서 묻는다. 


나는 암몬인가? 


암논적 태도는 자신의 힘을 남용하여 약자를 공격하고 악을 은폐한다. 


나는 내 힘을 봉사하는데 사용하는가 아니면 착취하는데 사용하는가? 나는 내 행동을 사람들을 “향해서(to)”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위해서(for)” 한다고 보고 있는가? 내가 투영하는 ‘신실함’의 의미가 행여나 현실과 동떨어지게 방치하지는 않았는가? 나의 평판이 행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발생하는 더러움을 표백하고 있는 건 아닌가? 행여 잘못을 저질렀다면 깨끗이 씻을 것인가, 덮을 것인가? 내 죄가 나를 빛으로 인도하는가, 아니면 더 짙은 어둠으로 이끌고 가는가?  


나는 요나답인가? 


요나답적인 태도는 치밀한 전략과 “더 큰 선”이라는 합리화를 통해 암논의 악을 변명하고 그 악이 가능하게 만든다. 


누군가의 현재 위치와 미래의 가능성을 너무 믿는 바람에 나는 행여 규칙을 어기거나 또는 눈을 감아버리지는 않는가? 나의 행동은 “중요한 일을 하는 중요한 사람”에 대한 충성인가, 아니면 희생자에 대한 헌신인가? 나의 본능은 브랜드(명성) 보호인가, 아니면 양떼를 돌보는 것인가? 보통 사람들의 희생을 더 큰 선을 위해 필요한 부수적인 피해로 보고 있지는 않은가? 내게는 진실보다 나의 패거리(tribe)가 더 중요한 건 아닌가? 

 

나는 압살롬인가?


압살롬적 태도는 문제를 빛 가운데로 드러내는 대신 최대한 “집안 문제”로 최소화하고 관리하려고 한다. 


현재 상태를 흔들지도 모를 성경적 평화보다 인간적인 “평화와 고요함”을 더 중요시 여기는가? 나는 고요한 삶을 위해 주변애서 자행되는 악행을 최소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람들을 침묵시키거나 통제하기 위해 “패밀리 카드” 또는 “충성도 카드”를 사용하고 있는가? 빛 가운데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어둠 속에서 문제를 조작하려고 하는가? 내 손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아니면 외부에서 빛이 비치도록 할 것인가?


나는 다윗인가?


다윗스러운 태도는 분노를 표출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의 책임을 소홀히 하고 수동적인 태도를 유지할 뿐이다. 


내가 돌보는 사람들을 위한 내 책임을 포기하고 있는가? 행동이 필요할 때 대면해야 하는 사람들과 불만을 피하고 있는 건 아닌가? 내 자신이 부적절하다는 생각 또는 위선이라는 비난을 받을까봐 두려워서 제대로 죄악의 문제를 다루지 못하고 있는가? 


기능이 망가진 시스템에 연루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암논이 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은 아주 기준을 낮게 잡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결코 다말을 보호할 수 없다. 우리가 암논은 아닐지 몰라도, 얼마든지 요나답과 압살롬 또는 다윗은 될 수 있다. 나의 유혹은 어디에 있는가?


물론 우리가 될 수도 있는 다섯 번째 인물도 있다. 


그럼 다말은 어떤가? 


사무엘하 13장의 이야기는 타락한 다윗 집안, 즉 망해버린 인간의 집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사야서 9장은 구속을 보여준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사람의 집은 결코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없다. 보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강림하셨다. 그분은 얼마나 다른가? 그를 드러내는 다음 네 개의 이름을 살펴보자. 


- 그는 훌륭한 상담자이다. 모사자 요나답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의 지혜는 사랑에 근거해 전능함을 사용하는 것이다. 

-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무력하고 움찔거리는 다윗왕과 같지 않다. 우리에게는 이제 “공의와 의”를 확립할 통치자가 있다.

- 그는 영원하신 아버지이다. 암논의 “사랑”은 순식간에 증오로 변했다. 그러나 영원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랑으로 가득한 분이 우리에게 오셨다. 

- 그는 평화의 왕이다. 압살롬과 달리 그리스도는 겁쟁이도 또 자경자도 아니다. 그는 악을 최소화하지도, 또는 조작하지도 않는다. 압살롬이 사무엘하에서 전쟁과 분쟁을 증가시키는 동안에도 우리 그리스도는 끝없는 평화의 제국을 가져오셨다.


오늘날 우리는 이사야가 예언한 바로 그 왕국의 상속자이며, 그 왕국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이 지상에서 멈추지 않고 자라나고 있다. 이 왕국은 인간의 방식을 뒤집는다. 십자가에서 죽은 희생자가 승리자로 판명되었다. 그가 이룬 승리는 희생을 통한 승리이다. 그의 왕국에서는 섬기는 자가 통치자이며, 강한 자는 보호하고, 낮은 자는 높이 들리고, 몸은 성전이며, 성(sex)은 신성하며, 희생자는 영광을 받는다. 따라서 이런 진리가 훼손될 때,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피해를 입었을 때, 그것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심지어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해서 그런 악이 발생할 때, 그 보다 더 큰 악은 있을 수 없다. 그런 악을 저지르는 자는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적그리스도보다 강하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다. 우리가 이 세상의 악, 즉 모든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방식을 바라보면서도 여전히 그리스도가 더 강하고 더 진실하고 더 실제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리고 믿음은 달리 말해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누구라도 다말의 처지에 처하면 희망을 갖는 게 힘들 것이다. 사무엘하 13장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이사야서 9장을 믿는 건 불가능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하심과 권능과 사랑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지금 당신 귀에 속삭이는 그 작은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예수님이라는 희생자가 살아계신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나를 위해 살아계신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한 번 더 그리스도를 믿어보라. 그리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의 왕국과 그의 백성을 믿어보라. 이사야서 9장은 참된 평화의 장소, 새로운 사회, 참된 공동체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증명한다. 그곳은 희망과 치유의 장소이다. 물론 또 다시 믿음을 갖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암논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이 어디가 있겠는가? 당신이 전혀 차원이 다른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가 약속하는 전혀 다른 왕국을 향한 믿음도 한번 가져보도록 하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으로 우리 모두를 강건케 하시고 또한 온전하게 하심으로 오늘날 교회가 그의 이름에 합당한 성소로 다시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원제: When It Comes to Abuse, It Takes a Villag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나의 본능은 브랜드(명성) 보호인가, 아니면 양떼를 돌보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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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Glen Scrivener

글렌 스크리브너는 저술과 강연 및 온라인 매체를 통해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역에 힘쓰고 있으며, 복음주의 사역 단체인 Speak Life를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The Gift'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