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기도
by 최창국2021-07-08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기도하는 법을 아는 것은 우리의 기도생활에서 중요하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기도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시편의 탄식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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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오방 최흥종 목사님이 섬기셨던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대학 후배와 대화하던 중에 후배가 “기도의 언어를 다양하게 표현하고 실천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대화 후에 후배의 말이 내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신대원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치면서, 나도 그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배는 새벽예배 후에 성도들과 함께 걷기기도를 실천하고 있는 목회자이기도 하다. 요즈음 실제로 걷기기도를 실천하는 교회들과 공동체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한국교회가 사용하는 기도의 언어는 통성기도와 묵상기도가 일반적인 것 같다. 하지만 기도는 그 내용과 방법 면에서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 내용면에서는 감사기도, 찬양기도, 축복기도, 회개기도, 간구기도, 탄식기도, 중보기도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 방법적인 면에서는 묵상기도, 말씀기도, 노래기도, 쓰기기도, 몸기도, 구송기도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


잊혀진 기도 회복하기


일찍이 어거스틴은 입으로 기도하는 것은 한 배로 기도하는 것이요, 노래로 기도하는 것은 두 배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듯이, 우리는 다양하게 기도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입으로 기도하는 것, 즉 이성으로 기도하는 것은 한 배로 기도하는 것이고, 노래로 기도하는 것, 즉 이성과 감성으로 기도하는 것은 두 배로 기도하는 것이요, 몸으로 기도하는 것, 즉 이성과 감성과 몸으로 기도하는 것은 세 배로 기도하는 것이요, 다윗처럼 온 몸과 함께 비파와 수금으로 기도하는 것, 즉 이성과 감성과 몸과 악기로 기도하는 것은 네 배로 기도하는 것이다.

 
초대교회 때 형성된 중요한 경구가 있다. 바로 “기도의 법이 곧 믿음의 법이다”(lex orandi lex credendi)라는 경구다. 이 경구는 5세기의 수도사 아퀴테인의 프로스퍼(Prosper of Aquitaine)가 말한 것이다. 이 경구는 기도의 법과 믿음의 법을 형성해 왔다. 기독교 역사에서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유지해 왔다. 기도와 믿음은 중요한 관계가 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믿음과 삶의 방식이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요즈음은 총론의 시대이기보다는 각론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표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이다. 교육, 문화, 과학, 설교 등에서도 각론에 뛰어나야 하는 시대다. 총론은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말할 수 있지만, 각론은 깊은 연구와 고민과 경험 없이 불가능하다. 한국교회도 이제는 기도와 신앙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프로스퍼의 경구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느냐는 우리의 신앙과 삶의 방식을 형성하기 때문에 기도를 보다 구체적으로 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기도하는 법을 아는 것은 우리의 기도생활에서 중요하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기도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시편의 탄식 기도이다.


잊혀진 기도로서 탄식 기도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잊혀진 기도가 있다면 시편의 탄식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일반적으로 교회의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와 회개와 간구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시편의 애가는 개인과 공동체가 슬픔과 고통과 절망 속에서 느낀 부정적인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말한다. 시편의 애가는 파괴적인 상황에서 불안함을 느끼는 이들의 정직한 기도였다. 제임스 패커(James Packer)는 이런 형식의 기도를 ‘불평 기도’라고 불렀다. 그는 “성경에서는 착한 이들에게 나쁜 일들이 일어날 때, 그들은 마음껏, 그리고 시시콜콜 하나님께 불평한다. 그리고 성경은 그처럼 불평하는 기도를 지혜로 간주 한다”고 하였다(James Packer and Carolyn Nystrom, Praying, 181). 이러한 기도는 성경 전반에 걸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슬픔과 고통과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불경스럽게 여기거나 제한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부정적인 감정을 하나님 앞에 표현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여기면, 이러한 기도는 현실을 부정하게하기 때문에 오히려 두려움과 죄책감을 불러일으켜 자기 기만적인 의를 추구하며 살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감정인 분노와 불평을 억눌려서 내면의 무의식 속으로 흡수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억눌린 부정적인 감정은 매우 해롭다. 그것은 낙심에 이르게 할 수도 있고, 질투, 심한 조롱, 비참함 등의 뒤틀리고 파괴적인 행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에서 불평과 탄식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현상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플라톤의 사상에서 연유된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 이성이 원활하게 작용하려면 감정을 통제하고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의 사상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기독교 신학은 마음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허약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낳게 되었다. 나아가 오늘날 왜곡된 경건이해 때문에 지나치게 많이 슬퍼하는 사람이나 탄식하는 사람들의 믿음은 의심받기까지 한다. 사실 심각한 상실로 고통 받은 후 깊은 슬픔을 느끼지 못하거나 느낄 수 없는 사람은 정서적 장애가 있거나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을 단지 해결해야 할 문제로만 보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는 대신 문제를 해결할 열쇠만을 찾게 된다. 나아가 인간이 단지 부정적인 감정을 바꾸려고만 할 때 하나님을 찬미의 대상이 아니라 치유의 기술자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기도의 여정에서 자신의 내적 감정, 특히 부정적인 감정에 솔직해야 한다. 영적 가면을 써서는 안 된다. 부정적인 감정과 믿음은 중요한 관계가 있다. 불완전한 인간의 믿음은 의심과 불평 없이 자랄 수 없는 특성이 있다. 의심과 불평과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믿음은 의심, 불평, 즉 참된 의심과 불평으로부터 자란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의심과 불평을 피하려하기 때문에 올바로 기도할 수 없음에도 적극적으로 의심과 불평을 회피한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된 자아를 만들게 되고, 그런 자아의 영속성을 정당화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의심, 분노, 불평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거짓된 자아의 가면을 벗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람직한 의심, 분노, 불평 등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파괴적인 의심, 분노, 불평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불완전한 피조물인 인간은 부정적인 감정의 경험을 피할 수 없는 존재다.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바람직한 의심, 분노, 불평과 파괴적인 의심, 분노, 불평은 내용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방식과 관계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파괴적인 의심, 분노, 불평은 인간관계에서 발생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인간에 바로 쏟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바람직한 의심, 분노, 불평은 인간관계에서 발생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내놓은 것이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인간에게 쏟아내면 정죄와 공격이 되지만 하나님 앞에 탄원하면 간구가 된다. 시편에서 탄식 또는 불평 기도의 목적과 탁월성이 여기에 있다.


진정한 자신의 실재적 자아를 마주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영적 가면을 쓰게 된다. 시편의 애가는 이러한 영적 가면을 벗어던지도록 도전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돕는다. 특히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사이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내어 놓도록 도전한다. 시편의 애가는 불의하고 부당한 일들로 인해 발생하는 인간의 마음과 인간 공동체의 부정적인 감정의 언어들을 하나님 앞에 쏟아내는 고백과 양도를 통해 진정한 자기 발견, 즉 피조물임을 확증하게 한다.


변형의 여정으로서 탄식 기도


대상관계론의 관점에서 서술하면, 불평으로 시작된 기도는 기도의 행위가 진행되면서 점차 긍정적으로 변형(transformation)이 발생된다. 기도의 대화가 진척되면서 지금까지 기도를 통해 하나님에게 투사해 왔던 자기의 불평은 작아지고 더 큰 자기를 경험하는 계기가 찾아온다. 이는 자기 안의 상처, 슬픔, 고통 등으로 인한 탄원에서 진정한 ‘타자’에 대한 경험을 통해 건강한 ‘내사’(introjection)의 자리로 옮겨가는 것이다(A. Ulanov and B. Ulanove, Primary Speech: 29). 기도를 통해 내면의 변형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시편의 불평 자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자신의 불평(자기 투영)이 변형되어 가면서 내적 치유와 성숙을 경험하게 되고, 보다 더 깊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기도가 불평에 의하여 시작되더라도 그 과정을 통해 변형을 경험하는 신비적인 경험이 되는 것이다. 시편의 불평기도는 그 불평 자체에 있기보다는 자기 변형을 위한 한 여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기도는 성화, 변형의 여정, 즉 하나님의 은혜와 치료를 경험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된다는 것은 생명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람과 사물을 귀하게 여기며, 그것들을 잃었을 때 고통과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 3세기의 이레니우스(Irenaeus)는 “충만하게 살아있는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비록 불평과 탄원을 할 수 밖에 없는 피조물이지만, 불평과 탄원을 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충만하게 살아있다는 증거다.

제임스 패커(James Packer)는 이런 형식의 기도를 ‘불평 기도’라고 불렀다. 그는 성경에서는 착한 이들에게 나쁜 일들이 일어날 때, 그들은 마음껏, 그리고 시시콜콜 하나님께 불평한다. 그리고 성경은 그처럼 불평하는 기도를 지혜로 간주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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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창국

최창국 교수는 영국 University of Birmingham에서 학위(MA, PhD)를 받았다. 개신대학원대학교 실천신학 교수, 제자들교회 담임목사로 섬겼다. 현재는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실천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는 『삶의 기술』, 『실천적 목회학』, 『영혼 돌봄을 위한 멘토링』, 『해결중심 크리스천 카운슬링』, 『영성과 상담』, 『기독교 영성신학』, 『기독교 영성』, 『중보기도 특강』, 『영성과 설교』, 『예배와 영성』, 『해석과 분별』, 『설교와 상담』, 『영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 『영혼 돌봄을 위한 영성과 목회』 등이 있다. 역서는 『기독교교육학 사전』(공역), 『공동체 돌봄과 상담』(공역), 『기독교 영성 연구』(공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