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으로

이슈

현대 신정주의의 불편한 목소리
by Andrew T. Walker2022-06-27

신약성경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법 표준의 원천으로 설명하는 임무를 맡은 정부 당국이 등장하는 예는 없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공공의 장에서 울려 퍼지는, 자신감을 넘어 심지어 뻔뻔스러운 태도로 승리주의자처럼 행세하는 기독교 비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러한 승리주의 기독교 비전은 문화 전쟁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기독교의 패배에 진절머리를 친다. 세속주의의 타락, 변태, 비합리적 규범을 정당하게 비판하는 이 기독교 비전은 “중립”을 가장한 세속주의가 사실상 이 시대의 실질적인 신이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문화적 온전함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이 비전이 생각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제대로 제대로 파악하고 삶의 모든 부분에, 심지어 정부에까지 주님의 권위를 굳건히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기독교 비전이 미국의 사십 세 미만에게는 생소할지 모르지만, 이건 사실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이런 현상은 기독교 재건의 재탄생 또는 기독교 재건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적용시킨 신정(Theonomy)이다. 


기독교 재건 또는 신정?


T . 데이비드 고든(T. David Gordon)이 1994년에 쓴 에세이에서 지적했듯이 기독교 재건과 신정은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둘의 차이는 분명하다. 기독교 재건은 문화를 기독교의 도덕적 토대에 보다 더 명시적으로 결합시키는, 광범위한 신학적이고 문화적인 프로그램을 의미하는 반면, 신정은 모세 언약 속에 있는 민법적 요소를 현대 시민 정부에 적용하는 것이다. 신정주의자는 따라서 시민 정부가 단지 기독교적 지향점을 가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구약 속 이스라엘을 모델로 삼아 구체적인 법을 제정할 것을 요구한다. 


또 재건주의가 광범위한 문화 운동을 의미하는 반면, 신정은 특정한 해석학적 접근 방식을 드러낸다. 사실상 모든 신정주의자가 암묵적으로는 다 재건주의자이기 때문에, 기독교 재건과 신정에 대한 비판은 신정이라는 범주 아래에서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주로 1970-80년대 장로교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신정 운동은 정치 참여와 홈 스쿨링 같은 주제가 급부상함에 따라 보수적 복음주의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운동은 엄격한 성경적 정통주의, 정부 권한의 제한, 친밀한 가족 관계, 자유시장 경제를 옹호했다.


신정과 관련 있는 여러 인물들 중에는 루사스 존 러쉬두니(Rousas John Rushdoony)와 그레그 반센(Greg Bahnsen)이 있다. 러쉬두니가 쓴 세 권으로 구성된 ‘성경적 법률 강요’(The Institutes of Biblical Law)와 반센이 쓴 ‘기독교 윤리 속 신정’(Theonomy in Christian Ethics)은 이런 신정 운동을 태동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한 책이다. 데이비드 칠튼(David Chilton)과 게리 노스(Gary North)도 신정 운동의 주요 지지자이다. 신정 운동을 홍보하는 조직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오늘날 이 운동은 분위기와 참여 방식에 있어서 과거에 비해 덜 두드러진다. 


단순하게 정의할 때 “하나님의 법”을 의미하는 신정은 반드시 한 가지가 아니다. 그 안에는 다양한 가닥과 논쟁이 존재하며 신정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각자 다 취하는 입장이 다르다. 물론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법이 가장 위대하며 그 외 다른 모든 법은 다 하나님의 법에 비추어서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이냐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이 정한 궁극적인 권위에 따라  살고 있다. 그런 면에서 권위의 불가피함에 대한 주장과 더불어 “중립의 신화”라는 허울을 쓰고 세속주의를 정부와 법률 속에 포함시킨 것에 대한 신정주의자들의 비판은 매우 타당하다. 바로 이런 점이야말로 신정주의자들의 다양한 항변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신학 프로그램으로서 신정은 오늘날 민법이 모세 언약에 따른 이스라엘 민사법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신정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이 표준에 따라”(By This Standard)라는 말은 사회 생활의 모든 측면을 구성하는 가장 높은 권위로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의 권위를 버리는 순간 사회가 도덕적 무정부 상태로 퇴보할 것이라는 신정주의자의 비판 속에는 오늘날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중요한 점이 많이 숨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 때 인간은 결국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 자신을 놓기 마련이다. 


일반 형평 신정(General Equity Theonomy)은 모든 사람과 기관이 다 하나님의 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믿는다. 러쉬두니 신정(Rushdoonian Theonomy)은 모든 민사적 법률 시스템이 모세 언약에 기반한 사법 형태를 구체적으로 따를 것을 주장한다. 


종말론에 대한 신정적 이해와 교회와 시민 질서 사이의 관계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성경 말씀의 적용이다. 역사를 전형적인 후-천년왕국 시각으로 보는 경우에는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할 주님의 주권을 이 세상 속으로 가져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결실이 점차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주님의 왕국은 서서히 임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성경은 모든 의의 표준을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 통치자들은 자연법칙의 원칙뿐 아니라 이스라엘 민법의 특수성을 현실 속에 적용해야 한다. 


“완전한 세부사항에까지 이르는 법의 존속 타당성”은 신정에 있어서 필요한 법률 사용을 설명한 반센의 책에서 한 장을 차지하고 있는 제목이다. 그는 ‘기독교 윤리 속 신정’ 개정판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구약의 민법(확실하게 드러나는 ‘사법적’ 법칙들)은 범죄자의 처벌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화를 다 아우를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사회 정의의 모델이다.”


비록 교회와 정부의 관할권은 신정 아래에서도 분리되지만, 그 둘 다 시민의 의(civil righteousness)라는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 있고, 이 사실은 구약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구약은 오늘날에도 도덕적 죄 및 사법적 범죄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는 특히 더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이런 적용을 하기 위한 성경해석학은 무엇보다 모세 율법이 가진 지속적인 권위를 인정해야만 하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도덕적인 죄와 사법적 범죄에 대한 성경 속 처벌이 오늘날 현대적 맥락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신정은 해결책이 아니다


이런 신정 운동과 관련해서, 교회의 사명과 시민권과 신성함뿐 아니라 영원한 권위와 영적 권위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복음주의적 틀로서 신정은 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지한 비판이 있다. 


요약하면 신정의 오류는 다름 아니라 성경의 권위에 대한 성경 자체의 이해를 뛰어넘는 해석학에 있다. 이 잘못된 해석학에서 심각한 왜곡이 발생하고 그 결과는 타락한 정치 질서에서 교회의 역할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 


신정은 승리의 종말론을 전달하기 위한 손쉬운 해석학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신정은 종교를 도구화하고 교회와 국가 관계를 흐리게 하며 또한 종교적 반대까지도 위태롭게 만든다. 게다가 다른 언약이 드러낸 일반은총과 자연법칙의 혜택으로 인해 이제 굳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주장이 신정이라는 사실도 이미 증명되었다.


적지 않은 보수 학자들에 의해 충분히 입증된 복잡한 해석적 문제를 분석하는 대신, 해석학으로서 신정이 가진 문제점에 대한 가장 간단한 검증은 그것이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관계를 오해함으로 잘못된 적용을 도출한다는 점을 관찰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신정은 이스라엘 민법의 배경이 되는 도덕적 힘의 연속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매우 타당하다. 그러나 신정은 신권으로 통치되던 이스라엘 시대가 끝난 후 이스라엘 민법의 세부 사항을 적용하고 집행하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고찰해야 하는 언약적 단절(covenantal discontinuity)이라는 측면을 간과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이 다른 나라와 맺은 관계와 비교할 때 모든 면에서 매우 독특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린 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가진 관계의 독점성을 강화하고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런 이스라엘의 사법 제도는 애초에 다른 나라가 복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민법이 현대 시민 정부의 모델이 된다고 믿고 있는 신정은 이스라엘과 십계명 이전부터 있었던 도덕법의 존재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살인은 제6계명이 금지하기 전부터 해서는 안 되는 행위였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파괴하는 살인은 태초부터 금지된 것이었다(창 1; 4; 9). 살인 금지는 창세부터 계시된 바와 같이 하나님이 누구이며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그 뿌리를 두고있다.


자연법칙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영원한 법은 신성한 법으로 표현된다. 십계명은 자연법칙을 드러내는, 시대를 초월한 표현이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공식적으로 성문화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신정이 집착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이 신권으로 다스려지던 이스라엘에서 어떻게 기능했고 또한 오늘날 그것을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한 형태와 실행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 방식은 이스라엘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율법의 도덕적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 결과 율법 준수의 의무를 단지 특정 시간과 장소에만 부여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십계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효력이 있으며, 특히 신약성경은 그 중 아홉 개가 그러하다고 확증하고 있다. 더욱이 신정은 오늘날에도 민사 처벌을 적용하려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형벌 체계가 틀렸다는 게 아니라, 신정이 신권 통치를 받던 이스라엘의 고유 시스템을 현대에 잘못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해석학은 정태적(static)이며, 구속사 전체를 통해 성경이 분명히 일시적이라고 결론을 내린 한 시대의 법을 오늘날에 적용하려는 오류이다. 


잘못된 신학적 태도


다른 문제는 신학적 자세와 관련이 있다. 마르틴 루터는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의 차이점에 대해 설명했다. 전자가 즉위와 승리의 신학이라면, 후자는 고통과 상실의 신학이다. 신정은 근본적으로 영광의 신학이다.


명시적이든 아니든 교회가 얼마나 제 역할을 하는가의 여부는 문화가 기독교 규범을 얼마나 채택하고 있는가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고 신정은 주장한다. 그렇게 주장함으로써 교회가 가장자리로 밀려난 현실에 대해 일시적인 위로를 받을지는 몰라도, 전체적으로 볼 때 이런 주장은 결코 주변으로 밀려난 교회를 향해 외칠 신학이 아니다. 


신정은 그럼 지금 중국이나 이란에 있는 교회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신정이 하는 주장은 믿는 이들을 실망시키고 문화에 대한 원한까지 갖도록 만드는, 문화에 대한 정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한 극단적 종말론(over-realized eschatology)에 불과하다. 역사에 대한 보다 정확한 평가는 문화가 승리와 패배, 양쪽 모두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교회의 선교 사명을 놓고 오로지 승리 아니면 패배라는 이분법으로만 보게 될 때 결과는 언제나 유토피아 아니면 절망일 수밖에 없다.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영광과 십자가를 동시에 포용해야 한다. 이런 패러독스 안에서 사는 것은 당연히 복잡하지만, 이런 시각은 우리로 하여금 사회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교회의 사명을 깨닫게 함으로 보다 더 균형잡힌 시각을 갖도록 한다. 


신정이 교회와 국가 사이에 공식적인 통합을 원하는지 여부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의심할 바 없이 교회와 국가는 서로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협력해야 한다. 의도적으로라도 서로의 권위를 강화시켜야 한다. 그 결과가 좋을 수도 있고 또 나쁠 수도 있다. 종교가 정부의 하녀가 되거나 또는 그 반대가 되는 것은 나쁜 결과이다. 그러나 복음을 자유롭게 선포되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돕는 것은 좋은 결과이다(딤전 2:1-2).


유럽의 중세 시대를 엄밀히 신정 시대였다고 부를 수는 없지만, 그 시절을 통해서 교회와 국가 사이의 강력한 연합에 대해 한 가지 확실히 배울 수 있는 것은 그런 연합이 얼마나 좋지 않은가이다. “기독교 국가”(Christendom)를 갈망하는 그리움에 가까운 짙은 향수를 가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교회와 국가가 한통속이 될 때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어느 역사를 통틀어 살펴봐도 결코 찾을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교회와 국가가 연합했을 때 교회의 순수함이나 종교적 반대(religious dissent)가 고양된 사례이다.


도덕적, 종교적, 그리고 문화적 통일성의 매력은 종교의 자유가 희생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가치이다. 종교의 자유라는 하한선은 필수적이다. 모든 종교가 법에 따라 동등하게 인정받지 않는 한, 특정한 종교 단체는 반드시 회원 가입과 사회 참여의 기초로 원하는 엄격한 기준을 설정할 것이다.


가톨릭 대 개신교이든 아니면 개신교 대 다른 개신교이든, 어떤 한 그룹은 언제나 종교적 기준에 따라 상대방을 배제하고 싶은 유혹을 받기 마련이다. 개신교인으로서 나는 종교와 관련해서 국가가 간섭하도록 허용했던 장 칼뱅과 마르틴 루터의 태도를 생각하면 몸서리를 친다. 당시 소수에 불과했던 침례교도들은 교회와 국가가 연합해서 통치하는 세상에서 제대로 생활할 수 없었고, 나는 결코 그 당시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신정이 우리 사회의 무법(lawlessness)을 비판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신정이 제시하는 대안은 한때 존재했지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기독교 사회를 전제로 하고 있고, 또한 그 대안이 영속적이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신학적 일관성이 빠져 있다. 


그리고 정말로 신정이 옳아서 역사가 그들의 주장대로 기독교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면, 왜 세상은 지금 정반대를 향해서 달려가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서구 문화가 점점 더 이교적이 되어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점점 더 믿음을 잃어 가는 걸까? 아니면 주님께서는 이런 어려운 시대를 사용하여 알곡을 가리고 있는 걸까? 그러나 교회와 국가가 상호 호환적 관계를 유지함으로 가져다주는 결과는 시민종교의 바탕이 될 뿐 아니라 문화적 결속을 위해서 쓰임받는 구원 신앙의 핵심이다. 


신정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다


그럼 사회에 대한 도덕적 표준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말씀이 정당한 존경을 받지 않는 사회가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모든 사회가 말세를 살고 있으며 또한 머지 않아 심판을 받기 때문에 그 어떤 사회도 이러한 수준의 재생성(regeneracy)을 가질 수는 없다. 하나님의 나라를 제외하고는 하나님 말씀이 제시하는 기준에 맞는 문화란 있을 수 없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그럼 입법을 하는 데에 있어서 오로지 자율성과 인간의 이성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인간이 만든 법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자연법칙과 영원한 법칙이 담겨 있기 마련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건전한 원리도 찾을 수 있다. 신정을 거부한다고 제대로 만들어진 세속법 속에 얼마든지 신성한 법칙이 들어있을 수 있다는 사실까지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J. 버드지스제위스키(J. Budziszewski)는 이렇게 썼다. “살인 금지와 같이 자연법칙 속에 포함된 신성한 법의 일부는 정부가 제정한 법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도덕적 불법을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신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창조 패턴에 더 잘 부합하고 노아 언약, 자연법칙, 그리고 성경(딤후 3:15-17)에서 강조하는 원칙과 더 잘 어울린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최고이다. 모든 사람과 문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궁극적인 충성을 바쳐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선언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직접적인 관할권 밖의 시민 영역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좀 더 현실적인 정치적 성찰을 위한 더 나은 출발점은 모세의 언약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확증하는 창조 언약과 노아 언약이다. 그리고 이러한 언약이 제공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구조와 설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데에 있어서는 자연의 이해와 더불어 이성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반드시 도덕법이 포함된다(시 19:1-3; 롬 1:32; 2:15).


그러나 타락한 이성은 도덕법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모호하게 하고 하나님이 창조 세계 속에 심어 놓은 원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사회에서 진정한 도덕적 의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계시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세 언약의 적용이 아니라 창조 속에 담긴 원리와 법칙을 이해하도록 돕는 특별한 계시이다. 


계시는 참으로 탁월하지만, 여러 규범이 선포되는 분야와 선포되는 방법에 관해서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지도자들이 신성한 명령을 드러내길 기대하는 것은 문화적 동질성이 있는 곳에서는 좋게 들리겠지만, 신정은 종교적 소수를 이등 시민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신약성경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법 표준의 원천으로 설명하는 임무를 맡은 정부 당국이 등장하는 예는 없다.


도덕적 반란 속에서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국가도 없지만, 그렇다고 신약성경이 말하는 국가가 그 국가의 정당성을 특별 계시에만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런 불편한 긴장 속에서 사는 존재이다. 정부는 특별 계시에 복종하는 지도자와는 별개로 정의로운 결정을 할 수 있는 합법적인 존재이다.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은 이 점을 말했고, 그는 또한 그런 주장을 할 때 조금도 모세의 언약에 의존하지 않았다. 성경적으로 그리고 심지어 역사적으로 말하면, 이교도 통치자들도 얼마든지 정의롭게 통치하는 게 가능하다(비록 정의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완전한 일관성이라는 면에서는 부족하더라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곳에서 사는 우리는 감사해야 하며 또한 이것을 세상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증거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자연법 내에서는 신정이 불필요하게 된다. 왜? 성경 어디에서도 종교적 합의가 확보된 사회에서 정의가 보장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적 합의가 있다면 좋겠지만, 정의의 표준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정의라는 것 자체가 항상 애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타락했고, 지금은 종말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 언약에 앞서서, 언약의 특수성 없이도 더 나은 도덕성의 기초를 제공하는 자연법칙을 주신 이유이다. 살인이나 수간과 같은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굳이 이스라엘의 민법이 필요하지 않다. 자연계시를 통해 드러난 창조 언약이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신정은 구약의 형법을 오늘날에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 이야기를 좀 더 잘 활용한다면, 현대 국가는 무엇보다 정당한 명령과 신중하고 현명한 형사적 제재를 통해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성경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금지하는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를 처형하지 않고 수감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창조 언약과 노아 언약과 같은 약속을 통해, 굳이 이스라엘과 똑같은 형태를 갖추지 않더라도 사회에 꼭 필요한 도덕 체계에 얼마든지 도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노아 언약에 대한 데이비드 벤드루넨(David VanDrunen)의 연구가 보여주듯이, 하나님은 “땅이 있을 동안”(창 8:22) 창조세계를 유지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비록 모호하더라도 자연법칙과 일반 은총을 통해 이 땅을 운영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런 약속이 비록 우리에게 문화적 지배에 대한 보장을 제공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 국가의 목사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도록 부름받았다.

 

불일치, 고통, 문화적 갈등은 종교적 제약을 벗어난 국가들로 인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종교적 합의를 공유했는지 여부에 따라 국가의 정당성을 결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사회가 기독교 이상을 중심으로 연합하고 정부가 그러한 약속을 반영하는 것은 좋지만, 신약성경 그 어디에도 정부의 정통성을 기독교의 인정 여부와 연결하지 않는다. 


복음의 능력을 선포하라


성경적 충분함을 지키겠다는 선의의 노력 때문이기는 하지만 신정은 성경이 드러내는 것 이상으로 그 개념을 확장했다. 신정은 구속 드라마가 아닌 결의론에(역자 주: 보편적인 규범을 정확하게 적용하기 어려운 특정 경우에까지 굳이 옳고 그른 것을 명확하게 결정하려는 기술) 더 집중하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신정주의자라면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 전체가 갑자기 또 다른 대부흥을 체험하고 기독교 국가로 변모하게 된다면, 그건 어떻게 이해할 건데?”

 

거기에 대한 대답은 신정적 의제를 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속한 교단의 고백을 인용하자면 대답은 이것이다. “자유로운 사회 속 자유로운 교회가 기독교적 이상이며,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자유롭고 방해받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어떤 시민 권력의 방해가 없이 진리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고 전파할 권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정치적 패권을 지향하는 국가를 원하지 않는다. 십자가의 가치를 능가할 수만 있다면 사탄은 기꺼이 시민종교의 가치에 의해 움직이는 도덕적 국가까지도 만들고 싶어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사람으로 넘치는 국가를 보기 원한다. 거기에는 공무원도 포함한다. 그러나 단지 정부가 우리 사명의 대상이 아니다. 변화된 정부는 모세 율법에 복종하지 않으면서도 자연법칙을 고수하는 변화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하나의 부산물일 뿐이다. 


미국 문화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깨어지고 비뚤어진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에 대해 도덕적으로 반항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신정이 매력적으로 들리는 것은 당연하다. 신정은 미국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회로 향하는 게 단순히 지붕에 난간을 설치하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신 22:8). 우리는 구속받을 문화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교회만이 할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통해 이 타락한 문화를 향해 예언적으로 선포하는 구속받은 개인을 찾고 있다. 


신정의 아이러니는 이론적으로 볼 때 그 주창자들이 엄격한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장려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실제로 신정은 국가 지원의 보조금에 의존한다. 신정은 또한 국가에 의존한 복지 지원을 실행한다. 국가의 허락이 없이 별개로 존재할 수 없는 신학적 시스템은 결코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의 구조와 사명과 일치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신정이 얼마든지 자유시장 경제학을 요구할 수도 있지만 그 결과는 통계주의 신학에 그칠 뿐이다. 


성경과 문화에 대한 신정적 접근 방식을 거부하는 게 성경의 영감성과 권위 및 충분성에 대한 경외심을 덜 갖는다는 의미일까? 결코 아니다. 논쟁의 핵심은 무신앙(unbelief)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현재의 구속-역사적 시대에 신정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로 모든 위조품에 대한 최종적인 권한이며 참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진짜 고민해야 할 문제는 이런 성경 자체가 거부되는 사회 속에서 우리가 문화 변증이라는 임무를 과연 어떻게 이해하는가이다. 




원제: American Culture Is Broken. Is Theonomy the Answer?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우리는 기독교 국가의 목사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도록 부름받았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Andrew T. Walker

앤드류 워커는 남침례 신학교의 부교수이다. 그의 저서 ‘모두를 위한 자유: 다원주의 시대에 모든 이의 종교적 자유를 옹호하기(Liberty for All: Defending Everyone’s Religious Freedom in a Pluralistic Age)’가 곧 출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