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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믿습니까?
by 이승구2020-12-27

인간들을 땅의 고운 흙으로부터 만드셨다는 말이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셨다는 말은 모두 창세기에 기록된 말이다. 창세기 기록을 믿지 않으면 인간 창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도 없고,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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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의 거룩하신 뜻에 따라 섭리하신다는 것에 이미 포함된 것이지만 인간의 창조와 그들에 대한 섭리를 따로 말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이전 신앙고백서들도 하나님의 창조 일반에 대해서 말한 후에 다시 인간의 창조에 대해서 말한다. 예를 들어서, 1561년에 공식화된 벨직 신앙고백서에서는 창조와 섭리에 대한 고백 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부터 사람들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만드셔서, 그들의 의지로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를 수 있도록 하셨다”(제 14조 앞부분)라고 인간의 창조에 대해서 따로 언급한다. 다른 신앙고백서들도 대개 그렇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인간 창조를 과연 어떻게 믿는가 하는 것이 잘 나타난다. 과거 신앙의 선배들의 진술을 생각해 보면서 지금 우리가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믿고 있는지와 비교해 보겠다.


창세기 기록에 따라서 인간 창조를 이해함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과거의 진정한 신앙인들은 인간 창조를 창세기 기록에 따라서 믿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인간들을 땅의 고운 흙으로부터 만드셨다는 말이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셨다는 말은 모두 창세기에 기록된 말이다. 창세기 기록을 믿지 않으면 인간 창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도 없고,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말이 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의 고운 흙을 사용하셔서 성경 가운데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언급되는 인간을 만드신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 우리들은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그 구성 요소들이 결국 땅의 있는 모든 요소들과 같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과연 창세기가 말하고 있는 것이 매우 정교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다. 그 화학적 구성 물질만 계산하면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아주 정교하고 놀랍게 만드셔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창조는 매우 놀랍다(Francis Nigel Lee의 ‘성경에서 본 인간_도서출판 토라, 2006’ 제2장 참조).


최초의 남녀가 창조의 여섯째 날 맨 마지막 피조물로 만들어졌음을 창세기 1장에서 배운(27절, 31절) 우리는 그 마지막 창조의 과정의 구체적인 모습을 창세기 2장에서 배우게 된다. 먼저 땅의 고운 흙으로 남자(아담)을 지으시고(창 2:7) 그로 하여금 동물들과 새들의 이름을 짓는 일을 하게 하시고(창 2:18-20), 그 가운데서 자신이 홀로 있음과 “그에게 상응하는 돕는 자”(우리 말 돕는 배필의 더 정확한 표현)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시고,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셔서(21절) 그 남자(아담)에게 이끌어 와(22절) 그들이 혼인하게 하시고, 이를 기점으로 하여 이후로는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라고 선언하여(창 2:24) 혼인 제도도 하나님께서 만드셨음을 창세기 2장에서 배우는 것이다.


이 땅에 성자께서 성육신하여 오셨을 때, 사람들의 이상한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질문하신 일이 있다(마 19:4-5). 예수님께서 창세기 1장의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말씀과 2장의 말씀을 다 그대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예수님을 따라서 창세기 1장과 2장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신대로 본래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창세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는 것과 같이 간다. 더 놀라운 것은 최초의 사람들만 그렇게 놀랍게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오늘도 창조하시는 새로운 사람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는 그 놀라운 인간 창조의 일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최초의 남자(아담과)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혼인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는 말로 명령(creation mandate)하시면서 복주셨다(the benediction of God). 이 명령과 복 주심에 따라 남자와 여자가 혼인하여 생육할 때에 새롭게 창조되는 아기들도 모두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최초의 창조 때에 땅의 고운 흙을 사용하셨던 것처럼, 이제는 더 인격적인 존재들인 부모될 이들을 사용하시지만 그들이 제2의 원인으로 작용해도 결국 개별적인 인간 생명은 다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정자와 난자가 합하여지는 그 때부터를 인간 생명의 시작으로 보며, 결국 자궁 외 임신처럼 어머니와 자녀의 생명 모두가 위태로운 때 외에는 모든 낙태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인간 복제, 그 위험한 도전’ 이승구, 2006). 그래서 우리들은 인간 영혼은 다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신다고 보는 견해가 가장 적절하다.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영의 아버지”(히 12:9)이시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인정함


그와 같이 놀랍게 창조된 사람을 기독교 전통에서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고 한다. 이것도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고 하신 말씀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하신(창 1:26) 말을 따라 기독교에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이 때 형상과 모양이라는 말을 이전 교부들이나 천주교회처럼 각기 다른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일종의 병행법적인 표현으로 보면서 같은 것을 지칭하는 것을 보는 것이 창세기에 대한 유대인 해석자들을 따르는 종교개혁의 전통이다. 그리고 다른 존재가 그렇게 고귀한 명칭으로 불린 일이 없고 오직 사람만이 이런 식으로 창조되었음을 확인하고서 우리들은 오직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이는 이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대로 단순히 인간은 고귀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오직 기독교 전통에서만 그 인간의 고귀성을 하나님의 형상에서 찾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만 인권(人權)을 제대로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와 같이 인간을 진화된 존재로 말하면 아무리 인간의 존귀함과 고귀성을 말한다고 해도 진정한 인권의 토대를 말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인권운동은 언제나 한계를 드러내고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진정한 인권을 말살하는 결과를 낸다. 이 세상에는 사람들을 위한다고 하면서 그 미명 하에 사람들을 어렵게 하고 심지어 억압하며 죽이는 일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우리는 진정한 인권의 토대로서 하나님 형상 개념이 회복되어야 함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본래 이 형상(imago)이라는 이 말은 결국 ‘반영’이라는 뜻을 지닌다. 여기 피조물인 사람이 있는 데, 그들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반영하도록, 그럴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부여 받아 지음을 받았다는 놀라운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반영할 때가 가장 정상적인 사람이 된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성경에 근거해 잘 궁구해서 그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그의 존재 전체로 드러낼 때가 참사람의 모습이 드러날 때인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회가 말하는 참 인간화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어떠함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잘못 반영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형상의 왜곡하는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deformed image of God)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를 다시 회복하는 일이 온전한 참 하나님 형상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에 의해서 일어나게 된다.


하나님을 잘 반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궁금해 하는 분들은 성경 전체를 더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이 회복된 상태를 표현하는 바울 사도의 말이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 까지 새롭게 되는 것”(골 3:10)이라고 하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엡 4:24)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었다. 이것은 본래 사람들이 창조된 모습을 표현하며 하나님을 반영하는 일을 제대로 못했던 것을,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새롭게 되었을 때, 아주 잘 이루어진다고 바울이 말한 것을 중요하게 보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바울이 이것을 강조했지만 다른 분들이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데 칼빈을 위시한 개혁파 사람들이 주로 이를 강조하여 말한다고 해서 이것을 ‘하나님 형상에 대한 개혁파의 해석’이라고 말한다. 이 신약 구절의 빛에서 이제 우리들은 더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개혁파 사람들은 “의롭고, 거룩하게 만드셔서, 그들의 의지로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를 수 있도록 하셨다”라고 강조한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거룩하며 하나님의 뜻을 잘 알 수 있는 것이,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에 자신들의 의지를 부합시키는 것이 하나님을 따라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는 것에 따라 하나님의 생각을 쫓으며, 그 계시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의식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하는 것을 자신들도 선하다고 여기며 사는 것이 하나님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렇게 제대로 하는 것을 본래적인 의(原義, original righteousness)라고 해 왔고, 이를 좁은 의미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다. 이것이 본래 창조된 인간의 상태였다. 이런 내용물이 채워질 수 있도록 그렇게 할 수 있는 기능을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기도 했다. 본래 사람은 이렇게 폭 넓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것을 다 인정하면 참으로 기독교적 인간 창조의 이해를 가졌다 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안타까운 일은 인간들이 원래 이런 고귀한 창조 상태(원상태)에서 떨어진 타락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고, 따라서 인간들이 본래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타락한 인간의 근본적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여기에 있는 타락한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것도 동물이 아닌 사람이기에 더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고귀성과 명확히 대조되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우리네 인간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뿐이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하나님의 참 형상으로 오셔서 구속을 이루셔서 우리로 창조의 그 모습을 다시 회복하면서 이제 다시는 타락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하시는 그 분과 연합하여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타락한 인간의 근본적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여기에 있는 타락한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것도 동물이 아닌 사람이기에 더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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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승구

이승구 교수는 기독교교의학(CHRISTIAN DOGMATICS)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로서, 총신대 기독교교육과 졸업, 합동신학대학(MDiv)과 영국 The University of St. Andrews(PhD)에서 수학했으며, 현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