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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성탄절에는 성육신을 묵상하자!
by 김선일2020-12-22

‘울면 안 돼’와 같은 인기 있는 캐럴이 성탄의 본질적 의미를 왜곡할 수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제공의 주체인 것도 그렇지만,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를 골라서 선물을 줄 것이라는 가사는 분명히 하나님의 전적 은혜의 선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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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은 지구촌에서 가장 큰 축제일이다. 축제에는 이유가 있어야 하고, 성탄축제의 이유는 물론 구주의 오심, 즉 아기 예수의 탄생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마치 우리 모두의 생일들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축제인 것처럼 설레고 즐거워한다. 올해는 코로나의 확산세로 거리마다, 집집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축제는 기대하기 힘들게 되었다. 이번 기회에 한번 되돌아보자. 우리는 왜 성탄을 경축하는가? 사실 예수께서 오신 날이 12월 25일인 것은 365분의 1외에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청교도들은 일부러 성경적 근거가 없는 성탄절을 택해서 메이플라워호의 하적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 공동체가 특정한 날을 정해서 구주의 오심을 기억하는 것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의례가 될 수 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날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되살려야 하느냐는 것이다. 대체로 성탄절을 장식하는 이미지들을 돌아보자. 성경에 근거해서 나오는 이미지들은 동방박사, 천사, 목동, 마구간과 동물들,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중심에 계신 아기 예수! 여기서 그려지는 이미지는 매우 소박하지만 평온하고 따뜻한, 그래서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풍경이 물씬 난다. 우리에게 익숙한 성탄 찬송의 가사를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사실 성경이 실제로 그리는 예수께서 나신 상황은 훨씬 억압적인 상황에서 처절해 보이지만, 예수께서 성탄의 중심이 되시기 때문에 전체 구도는 옳다. 성탄에 덧붙여진 부가 캐릭터들(산타클로스, 루돌프 사슴, 스크루지 영감 등)도 초점 일탈의 위험은 있지만, 축제의 기쁨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다만, “울면 안돼”와 같은 인기 있는 캐럴이 성탄의 본질적 의미를 왜곡할 수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제공의 주체인 것도 그렇지만,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를 골라서 선물을 줄 것이라는 가사는 분명히 하나님의 전적 은혜의 선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누가 그렇게까지 동요 캐럴을 심각하게 보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아이들에게 친숙한 동요에서 무의식적으로 스며드는 복음의 왜곡은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다. 그래서 필자는 과거 교육목사 시절 “울면 안 돼”를 교회 성탄절 행사에서 부르지 말도록 권고한 적도 있다. 사람들은 농담 반 진담 반 정도로 나의 권고를 받아들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쩌면 이는 우리끼리의 충만한 흥겨움과 설렘 속에서 성탄의 본질적 의미가 희석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필자는 성탄절에 우리의 신성하고 소중한 한 아기의 탄생일을 낭만화시키는 것 이상의 본질적 묵상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성육신에 관한 묵상이다. 신학적으로 성탄절은 성육신을 기념하는 날이다. 우리는 이 날에 왜 지극히 높으신 곳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 비천하고 죄 많은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셨는가를 기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절에 신자들은 마태복음 1장이나 누가복음 2장에 그려진 예수님의 출생 묘사 외에도, 요한복음 1:9-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선언이나 빌립보서 2:5-11에 나오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를 비우심’이라는 성육신의 의미를 살펴보는 기회를 가질 필요가 있다.

이 성육신의 의미에 관한 가장 고전적인 설명은 주후 4세기 당시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서 평생 목숨을 걸고 정통 기독론을 수호했던 교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문헌들에서 볼 수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육신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딜레마를 해결한 신비한 사건이라고 한다. 그의 책 ‘성육신에 관하여’(On Incarnation)는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성육신의 사건과 죽으심-부활의 사건을 하나님의 전체 구원 구도에서 본다. 성육신에 관한한 아타나시우스의 중요한 문장들을 고찰해보자(‘On the Incarnation of the Word’_St. Athanasius ;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참조).


육신을 입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부합되지 않는다. 원래 그분은 육체 없는 말씀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분이 인간의 몸으로 입으신 것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과 선함 때문이었다. 또한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하나님의 대리자도 말씀이어야 한다.(2)


말씀이 이 땅에 내려오시게 된 것에 대해서 우리는 죄송해야 한다. 우리의 범죄가 그분의 사랑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도우시고자 우리 중에 나타나셨다. 그분이 인간의 형체를 취하신 것은 우리 때문이며, 그의 크신 사랑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그분은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시고 나타나셨다.(4)


인간은 악마의 꾀임을 받아 영원한 것에서 부패한 것으로 돌아섰고, 죽음 속에서 스스로 부패하는 원인이 되었다.… 인간은 본성상 부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말씀과 연합하는 은혜로만 인간은 본성의 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5)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 했는가? 하나님은 인간에게 범죄로부터 회개할 것을 요구하셔야 했는가? 당신은 그것이 하나님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범죄를 통해서 부패하게 되었으니 회개를 통해서 인간이 다시 부패함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회개는 신성한 일관성(the Divine consistency)을 막을 수 없다. … 회개는 인간을 그의 본성에 따른 것으로부터 불러내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인간으로 하여금 더 죄 짓지 않게 하는 것이다. 오직 범죄 행위만 문제고, 이어지는 부패는 문제가 안 된다면, 회개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범죄가 행해지면, 인간은 그의 자연적 본성에 부합되는 부패의 권력 아래 들어서게 되고,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자신들에게 속했던 은혜를 빼앗기게 된다.(6-7)


태초에 무로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의 말씀 외에 누가 은혜와 구원을 베풀 수 있겠는가?. … 말씀이신 하나님만이 부패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성부의 일관된 성품을 유지할 수 있다. … 말씀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아버지와 연합하며 거하셨고 만물에 충만하셨다. 그런데 이번에 그분은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에 들어오셨다. 몸을 낮추셔서 그의 사랑 가운데 우리의 수준으로 낮추셔서 자기를 계시하셨다.(7-8)

위의 문장들에서 엿보이는 중요한 통찰들은, 인간의 타락은 인간을 범죄자로 만들 뿐 아니라 육신을 부패하게 하는 죽음의 법에 종속시킨다. 회개마저도 인간의 부패를 막을 수 없다. 오직 만물을 창조하신 말씀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 본래 육신을 입으실 필요가 없는 말씀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낮추사 육신을 입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로 말미암은 놀라운 구원의 사건이다. 아타나시우스의 논증에서 전달되는 성육신의 분위기는 인간의 곤경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우심과 긍휼, 그리고 자기를 내어주신 전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하다. 성탄절은 바로 이 성육신의 은혜를 기념하는 날이다.  


필자가 성탄절에 성육신을 상기하자고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종종 성육신은 우리에게 사역의 원리로 제시되곤 한다. 우리의 성육신이 강조된다. 그래서 선교나 목회 앞에 성육신적~ 이라는 수식어가 유행으로 달라붙는 말이다. 필요하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성육신은 그에 앞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아타나시우스가 말한 것처럼, 성육신은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계시하는 사건이다.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게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초대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대속을 이루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대신해서 사역을 하신다. 우리 스스로도 우리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고 얼마나 자주 입버릇처럼 말하는가! 이 모든 은혜의 선물이 성육신을 기점으로 이루어졌다. 아타나시우스의 성육신 사상을 신학자 앤드류 퍼브스(Andrew Purves)는 ‘십자가의 목회’라는 저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일로 인간을 섬기고, 인간의 일로 하나님을 섬기신다”는 역설적 표현으로 요약한다. 하나님이 정말로 인간이 되신 것은 단회적인 구원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전적으로 인간이시고 전적으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되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대속제물이 되셨을 뿐 아니라, 또한 부활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그의 구원 사역을 우리와 연합하사, 우리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지속하고 계시다. 


언제부터인가, 성육신이 우리도 인간의 숭고한 의지로 모방할 수 있는 예수님의 ‘자기희생적 모본’으로 전락되었다. 성육신을 많이 언급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친히 죽으신 전적인 은혜와 구원의 사건으로서 보다는 사역자의 바람직한 태도와 원리로 회자되고 있다. 물론 사역자에게 성육신적 태도와 헌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순서를 분명히 하자. 성육신은 인간에게 요구되는 권장할만한 행동이 아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가장 신비롭고 은혜로운 선물이다. 사역자의 성육신은 오직 이미 우리를 대신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이 모든 구원의 신비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을 때만 가능하다.


성탄을 앞두고 우리고 필히 되새겨야 하는 성육신의 요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다. 성탄은 지고지순한 아기의 탄생에 낭만적으로 젖는 시간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낮아지신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역사적 자기 계시를 기억하는 시간이다. 이 성육신이야 말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긍휼어린 은혜와 열심에 감격하게 하며, 성탄의 기쁨과 감사를 극대화할 것이다.

성탄은 지고지순한 아기의 탄생에 낭만적으로 젖는 시간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낮아지신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역사적 자기 계시를 기억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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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선일

김선일 교수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를 거쳐 풀러신학대학원(MDiv, PhD)에서 수학하고 2008년 9월부터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풀러신학대학원 재학 중에는 한인 최초의 캠퍼스 교목으로 일했으며, 한국교회의 청년 선교와 교회 성장을 위해 섬겨왔다. 저서로는 ‘전도의 유산: 오래된 복음의 미래’, ‘교회를 위한 전도가이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