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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문화

선이해와 포스트모더니즘: 성경적 해석의 3원칙
by Trevin Wax2020-12-02

성경을 읽을 때 백지 상태로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다 특정한 질문과 어떤 가정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No one comes to the biblical text as a blank slate. We bring certain questions and assump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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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성경을 이해하려면 다양한 목소리가 필요할까?)에서 나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신학자와 성경 주석가를 찾는 데에서 열정을 느끼는 복음주의자들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번역자가 가진 사회적 위치와 문화적 배경이 작업 자체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할 때,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성경을 읽으며 또 우리가 가진 문화적 시각 장애(cultural blinders)를 제거해 주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


이런 흐름과 동시에, 해석학에 적용되는 관점 이론(standpoint theory)의 변형이 생겨났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성경 본문을 대할 때에는 배타적 통찰력(exclusive insight)을 제공하는 “살아있는 경험”이 담긴 억압받는 집단이나 소수 집단의 목소리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식의 논리적 결론을 유도하는 관점 이론은 자연스럽게 수수께끼 하나를 던진다. 특권이나 억압이라는 측면에서 너무도 깊게 얽혀 있는 사회적 위치로 인해 특권 집단의 해석은 결국 피할 수 없는 편향성(다른 말로 하면, 오류)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또한 모든 지식은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구성되었기에, 텍스트가 가진 “객관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결국 무의미한 노력(exercise)으로 그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문화라는 새장에 갇힌 포로에 불과하다. 단지 어떤 새장이 그나마 좀 더 나은 새장인가 아닌가의 여부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세계 다양한 지역 기독교 신학자들의 의견을 듣고 싶어하는 진지한 소망을 가진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스스로를 과거 신학적 권위자들의 지혜에서 단절시킬 수도 있는 일종의 관점 이론에 빠질 위험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관점 이론에 대한 적절한 반대를 표명하는 다른 복음주의자들은 “현대적” 도구로 포스트모던 문제에 맞서 싸울 수 있으며, 우리가 텍스트에 주입하는 “선이해”의 영향을 최소화하면서도 다양한 목소리라는 지혜를 차단할 수 있다.


이번 글과 다음 두 글에서는 이런 두 가지 오류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원칙을 제시할 생각이다. 이 글의 목표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대한 우리의 믿음(commitment)을 약화시키는 철학(현대이든 포스트모던이든)에 결코 속지 않는 더 나은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이다.


1. 성경 이해에 영향을 미치는 거리가 주는 차이(areas of distance)를 최소화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필요 이상으로 과장해서도 안 된다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복음주의 표준 교과서라고 볼 수 있는 그랜트 오스본(Grant Osborne)의 ‘해석학적 나선형'(The Hermeneutical Spiral)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우리의 능력에 도전하는 네 가지 거리 영역을 언급하고 있다. 


① 시간

② 문화

③ 지리

④ 언어

성경의 “명료성” 또는 “명확성”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현대 세계와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 사이의 거리를 줄이려는 그 어떤 진지한 연구를 배제하지 않는다. 성경의 명확성을 믿는다고 말할 때, 다른 건 몰라도 성경 속에 담긴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내용만”은 교육을 받았든 교육을 받지 않았든 대상에 관계없이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모든 사람에게 명확하게 전달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동시에 성경의 명확성에 관한 교리는 모든 성경 구절이 똑같이 명확하다거나 또는 문화적, 지리적, 언어적 차이에 대한 주의 깊은 연구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관점 이론, 즉 성경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다른 문화나 배경을 가진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에 저항하는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스코틀랜드의 상식적 현실주의(Scottish Common Sense Realism)로 회귀할 수도 있다. 오스본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상식적 현실주의는 이렇게 주장한다. “텍스트는 그 자체로 의미를 드러내는 데에 충분하다. 따라서 문화적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해석학적 원리의 필요성은 무시되어도 되고 개인주의적 해석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누가 봐도 적지 않은 문제점을 가진 현대 계몽주의 시대의 해석 이론을 옹호함으로써 포스트모던 해석 이론을 반대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 


어떤 기독교인은 거리가 주는 차이 자체를 무시한다. 그러나 또 어떤 기독교인은 지금 시대에 하는 그 어떤 해석도 정확할 수 없다는 식으로 그 차이를 과장하기도 한다.(다음 글에서 이 차이를 과장할 때 생기는 문제에 관해서 다룰 것이다)


2. 우리는 누구나 다 성경 구절에 “선이해”를 가지고 있다 


오스본은 “문화유산과 세계관이 해석에 미치는 영향을 적절하게 고려할 것을” 촉구한다. 또한 그는 “지식에 관한 사회학은 현실을 자각하는 모든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가치를 놓치지 않는다. 이것은 해석 과정에서 선이해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라고 지적한다.


성경을 읽을 때 백지 상태로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다 특정한 질문과 어떤 가정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아지스 페르난도(Ajith Fernando)는 죄책감/용서 패러다임과 명예/수치 관점 사이의 몇 가지 차이점을 설명한다. 또 다른 예는 에스더 아콜아떼(Esther Acolatse)이다. 자신의 저서 ‘권력, 공국, 그리고 성령(Powers, Principalities, and the Spirit)’에서 그녀는 북미에 살든 아니면 지구 남부에 살든 간에, 힘과 권력에 관한 성경적 언어와 관련해서만은 우리가 어떤 특정한 틀이나 또는 성경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 속으로 통합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계몽주의 이데올로기는 북미에 영향을 미치는 반면, 이원론은 지구 남쪽 지역에 더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세계관을 조사하기 위해 아콜아떼는 서구의 성경 독자들 뿐 아니라 지구 남쪽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도전거리를 던진다.


비슷한 맥락이기는 한데, 랜돌프 리차드(E. Randolph Richards)와 리차드 제임스(Richard James)의 저서 ‘개인적 눈으로 성경을 잘못 읽기’(Misreading Scripture with Individualist Eyes)는 개인주의적 직관에 의해 형성된 개념적 범주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고대 문화에서 발생하는 성경 이야기의 중요한 측면을 놓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탕자의 비유를 예로 들면, 미국인보다 러시아인이 비유 속 기근을 기억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을 뿐만 아니라 독립하겠다는 어린 아들의 요구(이로 인해 가족 관계가 무너짐)도 미국인에 비해 훨씬 더 심각한 잘못으로 받아들인다. 이제 반해 미국인들은 이 비유 속 그 어떤 측면보다 아들이 느낀 절망감의 주된 원인으로 자원 낭비와 자급자족의 실패를 강조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혀 다른 문화는 우리가 본문을 읽을 때 가지는 “선이해”로 인해 같은 이야기가 전혀 다르게 조명되도록 한다.


성경에 문화가 없다는 게 아니다. 성경 독자도 그건 마찬가지이다. 데이비드 클락(David Clark)은 탁월한 신학 방법을 서술한 그의 책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To Know and Love God)’에서 복음주의자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문화를 반영한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내가 추구하는 신학에는 문화적 요소가 주는 선입견이 없는 것처럼 간주한다. 물론 최대한 그런 신학을 추구해야 하겠지만, 그건 그 누구에게도 가능하지 않다.”


그럼 모든 성경 해석이 결국은 다 문화라는 감옥 또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인가? “선이해”를 인정한다는 게 텍스트가 가진 진실하고 진정한 이해에 도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의미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제 세 번째 요점을 살펴보자.  


3. 우리는 지식에 대한 모든 주장이 다 권력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에 반박해야 한다


2007년 케냐의 리무루(Limuru)에서 세계 복음주의 로잔 회의와 관련된 실무 그룹은 “완전한 지식(exhaustive knowledge)과 인간 진보에 대한 현대인이 가진 신화(myths)”를 폭로하는 한도 내에서 어떻게 포스트모더니즘도 복음주의자들에게 동맹이 될 수 있는지를 지적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계몽주의의 오만에 구멍을 뚫었고, 이건 복음주의자들이 기뻐할 일이다. 


그러나 로잔 문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서술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지식을 이해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적이며 지식을 소유했다는 주장을 권력을 얻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 간주한다.” 이런 이유로 복음주의자들은 관점 이론에 반대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확실성을 주장하는 계몽주의 요새로 후퇴하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부분적으로 알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성경이 확증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클락(David Clark)은 이렇게 말했다. 


“최상의 상태에 있는 복음주의 신학이라면 관점(perspective)이 모든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단호한 모더니스트 주장을 적절하게 해체하는 것은 모두에게 좋은 것이다. 그러나 적절한 복음주의 신학은 문화적, 역사적 장소로 인해 신학이 특정 시대의 생각에 갇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계획적인 전략이 필요함을 잘 알고 있다.”

리차드 린츠(Richard Lints)는 그의 저서 ‘성경의 지속적 권위'(The Enduring Authority of the Christian Scriptures)에서 선이해가 실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모든 통역은 통역사의 독특한 경험에 영향을 받는다. 이 독특한 경험의 일부는 통역사의 사회적 위치와 문화적 맥락이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보는가는 그 사람이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가에 영향을 받는다. 이처럼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가 등등의 기대는 개인 및 사회적 지향의 복잡한 상호 작용으로 인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린츠는 이런 선이해가 텍스트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도록 하는 게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건 아니라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또한 선이해를 인정하는 게 반드시 모든 해석을 다 상대적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문화적 서사의 한 부분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해석이 똑같이 타당할 수 있다고 믿도록 만들거나 또는 누군가의 해석이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나오는 비판에서 자유롭다고 착각하도록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얇팍한 지식이 담긴 서사를 조금 보탠 이 더 큰 이야기는 오히려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모든 해석이 다 동등하지 않다는 것이다. 문화적으로 선한 영향을 받은 해석이 있고 나쁜 영향을 받은 해석도 있기 마련이다.”

후자의 요점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해석의 다양성이 결코 해석학적 상대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음 칼럼에서는 우리가 관점 이론으로 미끄러지거나 계몽주의의 확실성으로 후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진실에 눈을 뜨고 있는 게 왜 중요한지를 살펴볼 예정이다.




원제: Preunderstanding and Postmodernism: 3 Principles for Bible Interpretation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해석의 다양성이 결코 해석학적 상대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A diversity of interpretations does not imply hermeneutical relativ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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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Trevin Wax

트레빈 왁스는 LifeWay Christian Resources의 신학과 커뮤니케이션학과의 부학장이며 Wheaton College의 외래 교수이고, The Gospel Project의 편집자이다. '디스 이즈 아워 타임', '일그러진 복음', '우리시대의 6가지 우상', 'Gospel Centered Teaching'을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