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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세상 속 그리스도인의 “더 나은 의”
by 이춘성2020-10-23

산상설교의 도입부는 시내 광야에 있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와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나안에 세울 하나님의 나라의 삶의 원리와 법을 가르치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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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마태복음 5-7장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산상설교’로 불린다. 산상이란 명칭이 붙은 것은 이 설교가 산 위에서 행해졌기 때문이다. 5장 1절에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만 보면 예수님만 산에 계시고 무리와 제자들은 산에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로핑크(Gerhard Lohfink)와 같은 신약학자들은 예수님이 산으로 올라가셨고, 무리 중에 제자들만이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올라갔다고 설명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누가 예수님을 따라 산행을 하였는지, 특별히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 고된 산행을 할 만큼 적극성이 있는 자들이며, 이들은 소수라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고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문장은 구약의 어떤 사건을 가리키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시내 산에서 갈릴리 이름 없는 산으로


산상설교의 도입부는 시내 광야에 있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와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나안에 세울 하나님의 나라의 삶의 원리와 법을 가르치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 모습은 출애굽기 19장 20절 이하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모세를 그리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출 19:20) 하나님은 시내 산에 계시고 모세를 불러 말씀하셨다. 그리고 모세와 장로들은 광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산상설교에서도 예수님이 산에 계시고 제자들이 나아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 이런 구도는 구약의 시내 산 설교와 신약의 산상설교가 서로 비교되도록 한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백성을 가르치시며 주신 것이 무엇인가? 십계명 두 돌판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이다. 이것은 앞으로 세워질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이 지킬 삶의 원리, 윤리이며 법이다. 그렇다면 산상설교는 무엇일까? 예수님이 이루실 대속의 구원 사건 이후에 죄에서 탈출한 사람들로 만들어질 하나님 나라의 삶의 윤리와 법이 산상설교이다. 그러기에 산상설교는 오래전에 있었던 좋은 말씀, 혹은 따르기에는 너무 높고 숭고한 이상적인 말씀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구원받은 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며, 지켜야 하는 삶의 윤리이며, 법이 산상설교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이제 산상설교의 내용으로 우리의 삶을 판단 받고 우리가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 의롭지 않은지 알게 된다. 더 높은 기준과 본질적인 기준으로 우리의 삶이 판단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알아볼 ‘더 나은 의’다.


산상설교의 주제


산상설교의 핵심 주제는 ‘더 나은 의’다. 이 내용을 담고 있는 17-20절에는 비교급으로 표현된 ‘더 나은 의’의 비교 대상이 무엇인지 나온다. 그리고 그 관계성을 규정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17) 예수님은 시내 산의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를 완전하게 하러 오셨다고 한다. 완전이란 가득 채워서 부족한 부분은 메꾸고 채워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과거 시내 산의 윤리와 법에 부족함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의 시대와 상황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충분히 요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앞으로 이룰 하나님 나라와 그곳에 들어갈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더 고차원의 완전한 법과 원리를 요구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를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이 창세부터 발전하여 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시의 점진성, 하나님 나라 윤리의 완전을 향한 발전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이 무엇이며, 신자들이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율법 혹은 선지자


우선 17절의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율법이나 선지자(τὸν νόμον ἢ τοὺς προφήτας·)”는 무엇을 의미할까? 앞과 뒤가 동일한 운율과 단어로 끝나는 시적인 용법인 대구법과 같이 ‘율법과 선지자’는 산상설교의 마지막 결론 부분인 7장 12절에도 나온다. 예수님은 설교의 마무리에서 “율법과 선지자(ὁ νόμος καὶ οἱ προφῆται)”라고 말씀하셨다. 차이점은 17절은 ‘율법 혹은 선지자’로서 이 둘 중의 하나를 의미하지만, 7장 12절은 ‘율법 그리고 선지자’로 둘 다를 뜻한다는 것이다. 당시에 7장 12절의 ‘율법과 선지자’는 일반적으로 통용하는 관용어로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 이유는 구약성경은 토라로 불리던 율법이 기록된 모세 오경과 그 외의 선지자들에 의해서 구전, 기록된 선지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토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으로 주신 하나님의 법, 말씀으로 시내 산에서 하나님에게 받은 십계명과 그 외에 모세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한 5개의 성경책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법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자(삿 21:25), 이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토라로 이끌기 위해 선지자들을 대언자로 보내셨다. 이들 선지자에 대한 기록은 역사와 시, 지혜, 예언 등의 다양한 문학적 장르로 기록되었고, 히브리어 성경은 이것들을 선지서라고 불렸다. 그러한 이유로 구약 성경은 토라로 불리는 모세 오경과 선지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율법과 선지자”라고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토라와 선지서에 대해서 이해하는 방식과 그 위상의 문제 때문에 크게 두 파로 갈라져 있었다. 이것은 성경 해석을 둘러싼 신학적 이유에 근거하였다. 먼저 성전의 제사장과 서기관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 즉 토라만 직접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이 직접 모세에게 말씀하여 주신 토라만 성경으로 인정하였다. 이와 달리 지방을 중심으로 개혁 운동을 일으키며 신앙과 삶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던 신진 세력이었던 바리새인들은 토라 외에 선지서의 말씀들도 성경으로 인정하였다. 토라를 재해석하고 토라로 돌아오라고 가르친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단지 토라를 쉽게 풀어쓴 것이 아니라 발전된 토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토라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선지자들을 통해 더 발전되고 향상되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진보적인 주장이었다. 바리새파는 토라도 중요하지만, 더 향상, 발전된 내용을 담은 선지서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더 나아가 바리새파의 랍비들은 주석과 책들에 근거해서 십계명과 그 부속 조항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바리새파는 토라 외에 더욱 더 많은 항목의 법을 만들어 이것을 따르는 것을 경건의 바른 모습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두 세력의 어느 편의 손도 들어주시지 않았다.


율법


예수님은 율법(토라) 혹은 선지자 중 하나를 폐하고 이 중의 하나만을 선택하여 긍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 둘을 모두 긍정하였고, 더 나아가 이 둘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주장하셨다. 예수님은 먼저 18절에서 율법(토라)이 무엇인지 가르치신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 말씀은 토라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원래 의도대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루리라”는 헬라어의 중간태의 동사이다. 중간태란 능동태도 아니고 수동태도 아닌 상태를 의미한다. 능동태는 주어의 의지와 주도성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수동태는 주어의 뜻이 아닌 타인의 뜻에 따라 주어가 움직인다. 하지만 중간태란 주어가 주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수동적이지도 않은 상태,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서 인간이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고 성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유한한 인간의 모습에 대한 묘사이다. 유진 피터슨은 중간태의 신앙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특유의 환경 속에는 극단적인 대비가 불가능한 순간이 너무나 많다. 두 가지 의지가 작용하지만, 두 가지 모두 상대편을 배척하지 않고, 상대편을 소멸시키지 않으며, 서로 존중하는 경우가 있다. 헬라어 문법책은 이렇게 말한다. “중간태는 어떤 행동의 결과에 참여하는 주어들을 묘사하는 동사의 용법이다.” … 나는 다른 존재 - 창조와 구원을 이루신 주님 - 에 의해 시작된 행위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행위의 결과 속에 참여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내가 그 행위를 한 것이 아니며, 그것이 나로 하여금 어떤 행위를 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나는 이미 의도된 행위 속에 참여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우리 삶 속에서 촉진시키기 위해 줄을 잡아당기지 않는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독단적인 정체성에 굴복하도록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조작(능동태)하거나 하나님에 의해 조작(수동태) 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행위 속에 포함되고 거기에 참여하지만 그것을 조종하거나 제한하지 않는다(중간태).” (유진 피터슨, ‘묵상하는 목회자’, 좋은씨앗, 157-159쪽)


선지자


이어서 예수님은 선지자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여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19) 여기의 ‘가르치는 자’는 선지자에 대한 것으로 생각한다. 선지자들은 계명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버리지 않고 가르치며, 이를 따라 살아서 모범을 보였던 자들이었다. 선지자들은 토라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토라를 해석하고 당시의 사람들에게 토라로 다시 돌아오라고 가르친 사람들이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율법을 가르치고, 원래 의미를 밝혀 주는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각성시켰고, 이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오길 그들의 삶으로 보여준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과거의 법이 과거의 관습이나 문화가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법, 불변하는 삶의 원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예수님은 이런 이들의 삶에 대해서 긍정하시면서 이들을 천국에서 큰 자로 칭찬하셨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은 이러한 이들의 좋은 삶이 일종의 새로운 법과 규정이 되는 것을 경계하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


율법과 선지자


예수님은 제자들이 취해야 할 바른 입장에 대해서 가르치셨다. 20절의 말씀은 토라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던 사두개인이 다수였던 제사장과 서기관, 상대적으로 선지자를 중요시여긴 바리새파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부추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양쪽을 다 취하라는 기회주의적 가르침도 아니다. 예수님은 이 둘을 모두 인정하시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이 둘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가르치신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일차적으로 더 낫다는 것의 결론은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에 해당하는 황금률이라 불리는 7장 12절에 나온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또한 산상설교 전체는 이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기에 산상설교의 결론에 이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더 낫지 못하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더 나은 하나님 나라의 윤리’, ‘정의’가 무엇인지 분명해질 것이다. 앞으로 “산상설교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윤리” 시리즈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논리를 따라서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 알아볼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길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과거를 대표하는 보수와 현재와 미래를 대변하는 진보라는 두 프레임 속에서 ‘더 나은 의’가 하나님 나라 윤리를 어떠한 방식으로 제시하고자 하는지 간략히 알아보고자 한다. 예수님은 제사장과 서기관이 다수인 사두개파로 대표되는 사회의 보수주의자들과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개혁적인 진보주의자들의 어느 편에도 서지 않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이들 중 하나의 편에 서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들 중 한 편에 서는 것이나 이 둘을 적절히 조화하고자 하는 중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을 뛰어넘는 더 나은 길에 서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과거를 보수하고 지키려는 사두개인들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은 과거에만 집착하고 현재와 미래를 무시하는 비전 없는 보수주의자를 보셨다. 과거를 재해석하고 새롭게 나가려는 진보파인 바리새인들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은 과거를 재해석한다고 하면서 전통을 무시하고 새로운 법을 만들어 새로운 기득권으로 자리하려는 진보주의자들의 위선을 보셨다. 이를 보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런 자들에게 농락당할 수 없는 거룩한 말씀이라고 가르치셨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인 이 두 세력의 해석과 가르침보다 낫지 않으면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들 중의 하나와 같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분명히 알고 계셨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강하게 경고하신 것이다(마 5:20).


이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도 강한 경고의 말씀이다. 보수 기독교, 진보 기독교와 같은 정치 진영화 된 기독교와 교회가 ‘더 나은 의’를 추구할 수 있는 교회라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어느 한 편에 서기를 강요받는다. 예수님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두고도 율법 혹은 선지자로 나누고 이를 현실 정치의 진영으로 나눠 싸운 것처럼, 지금도 보수 혹은 진보라는 선택지 속에 기독교인들을 프레임화 하려는 세력과 유혹이 있다. 결국, 이 때문에 교회 안에서 편 가르기를 하고 서로를 향해 미움을 만든다. 하지만 예수님의 길은 이 선택지를 모두 취하겠다는 어정쩡한 중립이 아닌 이것들을 모두 뛰어넘는 ‘더 나은 제3의 길’을 찾으라고 요구한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가야 할 길이 바로 이 길이다.


분명한 것은 이 제3의 길은 보수와 진보를 모두 담을 수 있으며, 이 둘을 모두 조화롭게 하는 길일 뿐 아니라 이를 뛰어넘는 더 나은 길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천 년 전이나 지금도 산상설교를 통해 세상 속에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주시고자 하신 예수의 길, 하나님 나라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길은 이 선택지를 모두 취하겠다는 어정쩡한 중립이 아닌 이것들을 모두 뛰어넘는 ‘더 나은 제3의 길’을 찾으라고 요구한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가야 할 길이 바로 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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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춘성

이춘성 목사는 20-30대 대부분을 한국 라브리(L'Abri) 간사와 국제 라브리 회원으로 공동체를 찾은 손님들을 대접하는 환대 사역과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쳤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협동목사, 한국기독교윤리연구원(KICE) 사무국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