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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시편 73편에서 아삽이 말하는 좋은 죽음
by Timothy Kleiser2020-10-14

기독교인에게 좋은 삶이 좋은 죽음이라는 공식은 역설을 가져다준다. 왜 거룩한 자가 고통받는데 악한 자가 잘 먹고 잘 살다가 평안하게 죽는가?

For Christians, this ‘good life = good death’ formula presents a paradox: why do the wicked often prosper in life and death while the righteous often suf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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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를 포기하는 것이 나의 의도는 아니지만, 마지막에 내가 죽는 걸로 하지요.” 이건 마가렛 에드슨(Margaret Edson)에게 퓰리처상을 안긴 연극 ‘위트(Wit)’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비비안 베어링(Vivian Bearing)의 대사이다. 이런 암울한 장면은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관객들로 하여금 비비안이 죽을 지 말 지에 대한 추측을 하게 하는 대신, 죽음 자체를 향한 비비안의(그리고 우리의) 태도에 집중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이다.


누구나 다 죽음을 맞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음에 관해 생각하는 시간은 실로 놀라울 정도로 빈약하다. 누구나 다 살기를 갈망하지만 동시에 죽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으며, 우리는 예외없이 이런 현실을 회피하는 데에 있어서 전문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자 제프 그린버그(Jeff Greenberg)가 이름 붙인 그대로, 죽음은 우리 삶의 “본질에 자리잡고 있는 벌레”이다. 소설가 필립 로스(Philip Roth)는 또 이렇게 말한다. “침착하고 합리적인 모든 사람 속에는 죽음을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두 번째 사람이 숨어있다.”


죽음이 무서운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게 끝(finality)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지금도 다가오고 있고, 죽음의 도래가 가져다주는 질문은 너무도 많다. 내 인생은 가치가 있었던가? 내가 그동안 살면서 이룬 것에 어떤 목적이 있었던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런 질문들을 직면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면 우리는 “나는 이제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됐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자극을 받는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좋은 죽음”을 갈망한다. 내가 “좋은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궁극적으로 증명하는 죽음 앞에서 누리는 평안한 준비 말이다. 페트라르카(Petrarch)는 이렇게 썼다. “좋은 죽음은 한 평생에 대한 영예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는 이를 보다 더 시적으로 표현했다. “잘 보낸 하루는 행복한 잠을 가져다주고, 제대로 산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다준다.”


좋은 삶= 좋은 죽음?


기독교인에게 좋은 삶이 좋은 죽음이라는 공식은 역설을 가져다준다. 왜 거룩한 자가 고통받는데 악한 자가 잘 먹고 잘 살다가 평안하게 죽는가? 이 질문은 열두 편의 시편을 쓴 이스라엘의 음악가 아삽을 괴롭힌 문제였다(시 50, 73–83편).


시편 73편에서 아삽은 인생의 문제와 슬픔에서 벗어나서 행복한 삶을 살다가 평안하게 죽음을 준비하면서 맞는, 사악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슬퍼하고 있다(4-5절). 이미 쓰고도 남을 엄청난 재산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들은 부와 지위를 더 높이기 위해 폭력과 각종 억압을 사용하는 교만한 자들이다(6-7절). 이런 모든 과정 속에서 그들은 한없이 교만하여 하나님이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거나 관심을 갖고 있다는 식의 생각을 비웃으며 조롱한다. 죽음 뒤에 자신들의 삶을 판단하는 그 어떤 심판도 있을 리 없다는 생각에 그들은 아주 편안하게 죽음을 맞는다(8-12절).


이런 사람들과는 정 반대로, 다윗 왕 밑에서 수석 음악가로 또 예루살렘에서 언약궤 앞에서 찬양 사역을 감당했던 아삽은 실로 의로운 사람이었다(대상 16:1-5). 그러나 이런 아삽의 모든 신실함에 대한 보상은 그를 죽을 때까지 괴롭혔던 만성적인 고통과 각종 고난이었다(14 절). 그는 점점 더 악인을 질투하게 되었고(3절), 한 걸음 더 나아가 궁금해졌다. 내가 고통받는 동안 악인이 내내 번영하는 이런 현실 속에서 내가 하나님을 따르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다는 걸까(2, 13절)?


믿을 수 없는 인간의 재치


비비안 베어링이 ‘위트’의 말미에서 죽을 것이라고 밝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청중은 그녀가 어떻게 죽을지를 알게 된다. 바로 난소암이다. 난소암의 예후를 들은 비비안은 자신이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었다고 확신하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누구야? 나는 영어로 된 그 어떤 작품보다도 더 깊이 있게 죽음을 탐구했던 ‘존 던의 신성한 소네트(Donne 's Holy Sonnets)’를 연구한 학자니까.”


매우 성공적인 학자인 비비안에게 죽음은 본능적인 현실이 아니라 일종의 지적인 궁금함이었으며, 게다가 그녀의 놀라운 재치를 적용하기에 딱 알맞은 수수께끼이기도 했다. 그러나 암이 그녀의 몸을 갉아먹기 시작하고, 죽음이 보다 더 본질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아삽처럼 비비안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결국 그녀는 아삽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인간의 지혜 또는 재치(wit)야 말로 죽음에 대한 가장 비참한 준비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지혜는 고통이 없고 번영으로 가득 찬 현실이야 말로 좋은 삶의 가장 확실한 표시이자, 동시에 좋은 죽음에 대한 가장 순수한 약속이라고 말한다. 물론 건강과 세상의 성공을 바라는 건 본질적으로 전혀 잘못된 게 아니다. 이러한 축복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문제는 시편 73편에 등장하는 악인처럼,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더 갈망할 때 발생한다.


아삽의 지혜가 그에게 하나님의 면전에서 피하라고 말했을 때, 그는 그것을 거절하고 대신 고통과 당혹함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왔다(17절).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주시는 주께서는 또한 빼앗을 수도 있음을 아삽은 깨달았다(욥 1:21). 사악한 자들에게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이 이 땅에서 누렸던 축복과 함께 언젠가는 “순간에 황폐하게 될 것”(19절)을 의미한다. 갑자기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하나님은 일어나서 “그들을 파멸에 던지시고”, 또 그들은 “완전한 공포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18-20절).


죽음으로 이끄는 평안


‘위트’ 속 중요한 한 장면에서 비비안은 그녀의 교수였던 애쉬포드(E. M. Ashford)와의 대화를 회상한다. 그는 비비안에게 존 던(John Donne)의 시(sonnet) “죽음아, 교만하지 마라”에 대한 논문을 다시 작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처음 논문에서 비비안은 세미콜론과 느낌표를 사용하여 존 돈의 “생명”과 “죽음”에 대한 분석을 어색하게 병치하는, 달리 말해 “엉터리로 구두점을 남용하는” 방식에 의존한 것 같다. 올바른 버전을 통해서 이 극적인 구두점은 단순한 쉼표로 대체된다. “그리고 죽음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죽음은 죽을 것이다.”


“죽음은 이제 더 이상 무대 위에서 느낌표를 붙여서 연기해야 하는 게 아니야.” 애쉬포드는 말한다. “단지 호흡일 뿐이야. 삶과 삶을 영원히 구분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쉼표라는 거지.” 그러나 비비안은 여전히 지적 게임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럼 재치가 중요하군요!” 비비안은 말한다. 그런 그녀에게 애쉬포드는 이렇게 주장한다. “베어링 양, 재치가 아니야, 중요한 건 진리야.” 죽음은 실로 인간의 호흡처럼 순간에 지나가는 것이다.


시편 73편에 나오는 악인처럼,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쉼표가 아니라 마침표, 확실한 중단(hard stop), 삶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문단의 마지막 결말이라는 확신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견디고 있다. 죽음에 대한 이런 믿음을 붙잡은 사람들은 그 어떤 어리석은 신이나 최후의 심판도 기다리지 않는다는 안도감을 가지고 스스로 선택한 인생을 살다가 평화롭게 죽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이 하나님의 보좌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게 사실이라면, 사악한 자들이 임종시에 느끼는 안도감은 평안의 표시가 아니라 마비의 증거가 된다. 자기도 모르게 뱀에게 물려서 마비된 사람처럼, 악인은 치명적인 독이 지금도 자신의 혈관 속을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번영하던 악인이 평화롭게 죽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평화는 끝없는 죽음으로 이끄는 일시적인 평화일 뿐이다. 영원한 멸망이 악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아삽은 단 한 순간도 이 땅에서 행복한 악인을 부러워하지 않았다(21-22절).


생명으로 이끄는 고통


‘위트’의 이야기는 이제 비비안이 받은 항암 치료가 그녀를 일종의 구원으로 이끌어가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암에 걸리기 전 비비안은 비할 데 없는 재치를 통해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런 성공은 그녀로 하여금 자신만을 의지하게 만들었고 또 오만한(highbrow) 자만심으로 타인과 거리를 두는 관계의 단절로 이어졌다. 그러나 항암 치료가 끝날 무렵, 비비안은 그토록 자신하던 재치에 대한 확신은 떨어지게 되고, 오히려 별로 배운 거 없는(lowbrow) 간호사 수지를 어린 아이처럼 의존하게 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는 어린아이처럼 바뀐 그녀의 변신이 완성된다. 애쉬포드 교수가 방문해서 존 던을 읽어주겠다고 말했지만, 비비안은 거부한다. 이 장면은 그녀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바로 그 순간에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내내 붙잡고 있던 번영의 수단을 거부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대신 애쉬포드의 품에 안긴 비비안은 늙은 교수가 읽어주는 동화책을 듣는다.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집에서 도망칠 것을 꿈꾸는 새끼 토끼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생각을 알아챈 엄마 토끼가 새끼 토끼를 끝까지 쫓아가겠다고 말했을 때, 새끼 토끼는 이렇게 대답한다. “에이, 그냥 지금 있는 곳에서 엄마의 새끼 토끼로 사는 게 낫겠다.” 애쉬포드 교수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 이야기, 우리 영혼에 대한 우화 같지 않아? 우리의 영혼이 어디에 숨어있든지 하나님은 반드시 그 숨은 영혼을 찾아내시거든. 안 그래? 비비안?” 비비안은 교수의 말에 동의하는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는다.


아삽도 그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는 잠시 무식한 동물처럼 행동했지만(22절), 또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생각도 했지만, 그는 하나님이 결코 그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다(23절).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가져다주는 세 가지 유익을 생각했다. 하나님은 (1) 아삽을 그의 손으로 지키신다, (2) 아삽의 길을 인도하신다, 그리고 (3) 아삽이 죽을 때 그를 당신의 영원한 안식처로 맞아주신다(23-24절). 


헤아릴 수 없는 이런 축복을 자신의 힘과 지혜만 믿고 사는 가난한 악인과 비교해보라.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만으로도 번영하는 삶과 평화로운 죽음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무덤 너머에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실로 비참할 정도로 인간의 지혜는 부족하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다가 죽은 이들은 죽음이라는 짧은 잠을 자고 지옥에서 깨어났을 때,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들의 소망이 마침내 영원토록 이뤄졌다는 사실을 똑똑히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비교를 하고 나서야 아삽은 자기가 처한 상황이 한때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쁨을 느낀다. 오히려 반대로, 그를 슬프게 만들었던 고통은 오히려 새로운 종류의 축복인 것으로 밝혀졌는데, 하나님은 고통이라는 도구를 통해 하나님이 아닌 인간을 의지하는 처참한 구덩이에서 아삽을 들어올림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생명과 지속적인 만족을 알도록 하신 것이다.


감사함에 넘쳐서 그는 이제 이렇게 선언한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25-26절).


고대 희곡 작가인 아이스킬로스(Aeschylus)는 이렇게 말했다. “번영 속에서 삶을 마친 사람에 한해서만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 “번영(prosper)”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따라 이 말은 사실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아삽이 배운 것처럼, 우리는 그 번영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인간의 지혜와 재치를 감히 믿지 않는다.


인간의 지혜와는 달리 좋은 삶과 좋은 죽음은 악인이 누리는 평화로 정의되지 않으며, 의인이 견디는 고통 때문에 부정되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외부 상황과 관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27절)은 가장 끔찍한 고통이고,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28절)은 가장 고귀한 번영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죽음 이후에도 바뀌지 않는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The Good Death in Psalm 73

번역: 무제

인간의 지혜와는 달리 좋은 삶과 좋은 죽음은 악인이 누리는 평화로 정의되지 않으며, 의인이 견디는 고통 때문에 부정되지도 않는다

Contrary to human wit, a good life and good death isn’t defined by any peace the wicked might enjoy, nor is it denied by any pain the righteous might end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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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Timothy Kleiser

티모시 클라이저는 Boyce College에서 신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