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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문화

세속적 정의와 비판 이론에 대한 성경적 비평
by Tim Keller2020-09-11

인간에게 목적이 무엇인지 규명되지 않는다면 결코 무엇이 선이고 악이라고 말할 수 없고, 결과적으로 정의를 제대로 논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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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면한 문제 


정의라니? 도대체 무슨 정의를 말하는 건가? 하지만 요즘처럼 정의에 대한 요구가 드센 적도 없다. 그러나 정의에 관해서는 여러 다양한 의견이 있다. 정의와 관련해서 다른 사람이 당신과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성경적인 정의이다. 성경 속에 실로 오래되고 풍성하고 또 포괄적이며 매력적인 정의에 대한 개념이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사실을 잘 모른다. 성경적인 정의는 여러 면에서 세속적인 정의와 다르다. 그럼에도 성경 안에 풍성하게 드러난 성경적인 정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기독교인이 별로 없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현실은 다음 두 가지 면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첫 번째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다 예외없이 ‘정의를 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교회가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소명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 결과 정의와 한 발 떨어진 교회에 실망한 젊은 기독교인은 결국 세속적인 측면에서 정의를 바라보게 되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들의 삶을 왜곡시키게 된다.


정의의 역사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는 그의 책 ‘누구의 정의? 어떤 합리성?’(Whose Justice? Which Rationality?)에서 정의와 관련해 우리가 지금 처한 어려움을 잘 설명했다. 정의에 관한 모든 이해 뒤에는 언제나 다음 세 가지에 대한 철학적 믿음이 있다. 그것은 ① 인간의 본성과 목적, ② 도덕 그리고 ③ 실제적인 이성 - 즉 사물이 무엇인지 또 진정한 믿음을 어떻게 합리화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지금까지 인류에게는 다음 네 가지 기본이 되는 정의에 대한 역사가 있다. 전통 개념(호머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성경적 개념(어거스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성경적으로 통합한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계몽주의(특히 로크, 칸트 그리고 흄),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대의 자유주의적 접근법이다.


초창기 계몽주의 사상가는 도덕과 정의에 대한 근본을 하나님 또는 종교에서 찾는 대신 오로지 인간의 이성에서만 찾았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우리의 사고와 느낌과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순종해야 하는 절대적인 도덕적인 기준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도덕적인 결정은 굳이 이성보다는 감정에 충실할 때 더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사실상 오늘날에는 그런 흄의 사상이 대세를 이루고 있고 그의 후계자들은 그의 사고를 더 논리적인 결론으로까지 끌어올렸다. 즉, 모든 도덕적인 주장은 어떤 객관적인 기준에 근본을 두는 게 아니라, 문화적인 측면 뿐 아니라 개인의 감정과 선호도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이런 생각이 얼마나 틀렸는지를 잘 보여준다. 유명한 손목시계 예화를 통해 그는 애초의 목적이 무엇인지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시계가 ‘좋은 시계’인지 ‘나쁜 시계’인지 결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시계의 목적이 무엇인가? 시간을 알려주는 것인가 아니면 못을 박는 것인가? 후자라면 시간은 틀려도 튼튼하기만 한 시계가 ‘좋은 시계’일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목적이 무엇인지 규명되지 않는다면 결코 무엇이 선이고 악이라고 말할 수 없고, 결과적으로 정의를 제대로 논할 수도 없다. 세속적인 관점으로 볼 때 인간은 그냥 우연히 생긴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 인간 중에서 스스로 가치 있다고 느끼는 인간이 있다면 좋은 것이지만, 문제는 그렇지 않은 인간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무엇을 근거로 당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데이비드 흄의 후계자들이 만든 정의에 관한 현대 이론에 따르면 대답은 이것 뿐이다. “우리가 그렇다니까 그런 거야.”


근본의 문제


매킨타이어에게 많은 세속적 학자들은 이렇게 반박했다. “인간에게 굳이 어떤 근본은 필요하지 않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인의 권리가 중요하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상식’이니까.”


성경적 정의에 대한 간략한 요약


1. 공동체 : 다른 사람들도 내가 가진 부에 대해서 권리를 가진다. 그렇기에 나는 자진해서 부를 나눠야 한다


성경은 인간 세계를 상호간에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구약학자 부르스 왈트케(Bruce Waltke)는 잠언이 말하는 ‘의로운 자’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의로운 자는 자신에게 해가 되더라도 공동체에 유익이 있도록 하는 사람이고, 악인은 공동체에 해를 입히면서라도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다.”


2. 평등 : 모든 사람은 다 고귀함을 가진 존재로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


“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레 24:22). 뇌물이 부정한 이유는 가난한 사람에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돈을 얼마만큼 갖고 있는가에 따라서 더 우월하게 취급받게 하는 시스템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러운 일이다. 레위기 19장 13절과 신명기 24장 14-15절도 불평등한 임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3. 공동 책임 : 나는 다른 사람이 지은 죄에도 책임이 있고 또 때로는 그 죄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종종 한 개인의 죄를 가족 또는 그가 속한 집단에게도 물었다. 그렇기에 다니엘은 그의 조상이 지은 죄까지 회개했다(단 9). 이런 사례는 사무엘하 21장, 여호수아 7장, 그리고 민수기 16장에도 잘 드러난다. 특히 사무엘상 15장 2절과 민수기 23장 3-8절을 보면 하나님은 과거 조상의 죄를 현재의 사람들에게 묻고 있다. 왜 그런가?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① 집단적인 책임 : 아간의 가족(수 7)은 도둑질을 하지 않았지만 아간이 범죄하는 인간으로 자라는 데에 일조했다. 성경은 가족이 한 인격을 형성하는 데에 얼마나 중요한 책임을 가지는지를 여러 번 강조한다. 그렇기에 개인의 잘못은 단지 그 개인의 잘못으로 끝나지 않는다.


② 집단적인 참여 : 죄악된 행동은 단지 자신 뿐 아니라 그 사람을 둘러싼 모두에게, 심지어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대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출애굽기 20장 5절을 보면 하나님은 죄의 책임을 후손에게도 물으신다.


③ 제도화된 죄 : 사회적인 제도는 힘 있고 돈 있는 사람을 더 우대하는 쪽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형사 제도에서(레 19:15), 상거래에서 생기는 고금리에서(출 22:25-27; 예 22:13) 그리고 턱 없이 적거나 지연되는 임금에서(약 5:4; 신 24:14-15) 얼마든지 불공정한 사례들이 발생한다. 일단 이런 시스템이 제도화되면 일개 개인이 저지르는 것 보다 더 큰 악이 일어난다.


4. 개인적인 책임: 나는 내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책임을 진다. 그러나 그로 인한 모든 결과까지 책임지지는 않는다


① 나의 결과 : 성경은 결코 누군가의 성공 또는 실패를 단지 그 사람 개인이 취한 선택의 결과로 바라보지 않는다. 가난은 개인의 실패로 인해서 오기도 하지만 환경적인 이유로 발생하기도 한다(잠 6:6-7; 23:21; 잠 13:23; cf. 출 22:21-27).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결과를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② 나의 죄 : 집단적인 죄와 악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구원을 좌우하는 궁극적인 책임은 다 개인에게 있다고 강조한다(겔 18). 신명기 24장 16절은 이 점을 분명하게 한다.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그런 면에서 에스겔 18장은 집단적인 책임에 너무 많은 강조를 할 때 빠질지도 모르는 운명론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다. 집단적인 죄라는 현실이 결코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도덕적인 책임까지 면죄하는 것은 아니다.


5. 옹호 : 우리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해 특히 관심을 쏟아야 한다


어느 누구라도 차별해서 안 되지만(신 19:15), 그럼에도 특히 더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쏟아야 한다(사 1:17; 시 41:1).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잠 31:8-9). 가난한 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세상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특히 더 그들을 위해 신경을 써야 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렘 22:3). 예레미아 선지자는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약한 계층을 정확하게 짚어서 말하고 있다.


정의 이론의 스펙트럼


우리 문화를 지배하는 정의에 관한 이론에 있어서 크게 다음 네 가지의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이 모든 이론은 다 세속적인 이론인데 다음 두 가지 가정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①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의 생각과 달리 이 이론은 하나같이 이 세상에는 정의가 뿌리를 내릴 초월적이고 도덕적으로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고 간주한다. 이 이론은 예외없이 다 테일러가 주장한 “내적 기초(immanent frame)”에 그 근거를 두는데, 한 마디로 도덕적 가치가 무엇이고 또한 정의가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은 다 인간이 생각해낸 것이라는 주장이다. ② 이 모든 이론은 인간 본성을 백지 상태로 바라본다. 애초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기초를 가진 상태에서 태어나지 않기에, 나중에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인간은 얼마든지 재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1.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 – ‘자유’ 공정한 사회는 개인의 자유를 증진시킨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과도한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


개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정부가 통제하지 않는 자유로운 시장을 주장한다. 자유지상주의는 극도의 개인주의를 지향하는데, 그건 다름 아니라 모든 인간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고 그렇기에 개인에게 발생하는 모든 결과는 온전히 다 개인의 선택 또는 노력에 의한 것이라는 기본적인 확신 때문이다.


성경적 분석 :


가장 먼저 자유지상주의는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가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있다. 개인은 단지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닐 뿐더러 게다가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은 존재이다. 게다가 자유지상주의는 사회적인 압력에 의해 발생하는 가난이라는 현실도 경시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개인의 자유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이 죄악된 세상이 만들어가는 불평등한 사회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자유지상주의는 죄가 얼마나 이 세상에 만연한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은 알면서도 인간이 만든 자유 시장이 정부보다 더 타락할 수 있다는 점은 경시하고 있다.


세 번째로 성경이 말하는 자유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얼마든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존재이다. 인간이 단지 자기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자유의지를 발휘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사상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진정한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지 스스로에게 속하지 않았다.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2. 자유주의- ‘공정성’ 정의로운 사회는 모든 구성원에게 공정성을 증진시킨다


언론, 재산 그리고 종교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지상주의와 달리 자유주의는 개인의 권리를 교육과 의료복지에까지 확대한다.


자유주의가 자유지상주의와 특히 다른 점은 정부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인데, 정부가 세금 부과 뿐 아니라 시장 관여를 통해서 부를 훨씬 더 잘 분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관점 또한 기본적으로는 자유 시장을 가장 선호한다. 자유주의는 평등한 결과를 지향하는 게 아니라, 모든 개인이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지향한다. 그렇기에 개인마다 다른 결과는 결국 개인의 노력 및 노동 윤리에 따른 것이라고 바라본다.


성경적 분석 :


많은 학자들이 이미 밝혔듯이 자유주의가 가지고 있는 인간 권리에 대한 믿음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은 다 기독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기에 자유주의 관점은 오로지 성경과 기독교가 들어간 사회에서만 만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이라면 이 관점에 얼마든지 찬성할 수 있지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자유주의는 진화에 바탕을 둔 현대 사상과 결합함으로 수많은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가족을 포함한 공동체 해체의 위기까지 불러오고 있다. 그렇기에 혹자는 자유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개인의 자유와 이기심을 상쇄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에 종교적 영향력이 큰 사회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종교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상황이다.


두 번째로 정의가 단지 개인의 권리만을 지키는 것이라면 그보다 더 높은 도덕적인 절대성은 없다는 것이고, 그 결과 권리와 주장(rights-claims)이 충돌할 때 해결할 길이 막막해진다. 자유주의적인 입장에서 볼 때 페미니스트와 트랜스젠더가 충돌할 때, 누가 이기는 게 맞는 걸까? 그리고 어느 한쪽의 승리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한다는 것인가? 단지 숫자? 아니면 돈?


세 번째로 인간의 합리성은 결코 공정한 사회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합리성에 근거해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고? 오히려 인간의 합리성은 가난한 사람을 더 착취해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움직일 것이다.


3. 공리주의 – ‘행복’ 공정한 사회는 최대 다수에게 최대의 행복을 보장한다


세 번째 이론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과 관련이 있는데, 오늘날 세속적인 사회를 사는 사람들이 가진 기본 생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정의의 핵심은 최대의 숫자가 최대의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결국 이 이론 또한 ‘도덕적인 절대성’이 아닌 ‘실질적인 합리성’에 근거하고 있다. 즉, 뭔지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게 등장한다면, 그게 바로 정의라는 것이다. 물론 공리주의는 행복을 추구하는 경우에도 결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능하다는, 일종의 제한을 두는 “피해 원칙(harm principle)”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공리주의는 다수결주의이다. 더 많은 사람이 좋아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고, 그것은 오늘날 투표라는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다. 공리주의는 앞서 살펴본 개인을 중시하는 두 가지 사상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공리주의는 오히려 개인의 권리를 다수의 행복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본다. 그래서 이런 말까지 있다. “개인의 권리를 믿는 사람은 아마도 공리주의자가 아닐 것이다.”


성경적 분석 :


첫 번째로 공리주의는 창조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기에 개인의 존엄성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극소수가 감옥에 들어감으로 대다수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도 공정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문제될 게 없다.


두 번째로 죄에 대한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기에 대다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게 악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어리석고 악한 일도 얼마든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에 대한 깊은 인식이 없이는 단지 육체를 즐겁게 하는 거짓도 얼마든지 행복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다른 이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행복을 추구한다는 “피해 원칙(harm principle)”도 얼마든지 소수에게 악용될 수 있다. 대다수가 소수를 향해서 이렇게 말한다면 말이다. “이건 피해가 아니야.” 과거에 인종차별이 차별이 아니라 오히려 흑인을 위한 ‘보호 조치’라고 주장했던 이들이 있다. 그게 말이 되는가? 도덕적인 절대성이 없는 상태에서 소수의 행복에 대한 보장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4. 포스트모던 – ‘권력’ 공정한 사회는 압제 받는 사람들을 위해 지배 그룹의 권력을 전복시킨다


칼 막스(Karl Marx)의 가르침에서 시작한 네 번째 정의 이론은 포스트모던 비판 이론이라고 불린다. 


포스트모던 비판 이론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첫 번째로 사회의 모든 불평등은 불공정한 사회 구조와 시스템 때문이다. 해결책은 사회 정책 자체를 바꾸는 것이지 결코 개인적 차원에서 가능하지 않다.


두 번째로 모든 예술, 종교, 철학, 도덕, 법, 미디어, 교육 등등은 다 이성 또는 진리에 의해서 형성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사회적 압력(social forces)에 의한 결과이다. 모든 것은 다 당신이 가진 계급의식과 사회적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 종교적 교리도 다른 것들과 결부해서 사회적인 지위와 부를 획득하게 한다.


세 번째로, 그렇기에 모든 현실은 언제나 권력의 문제로 귀결된다. 계급은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어 있다. 만약에 당신이 백인이고 남자, 또 이성애자라면 당신은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다. 그 반대라면 당신은 가장 취약한 위치에 있고 그 중간에는 실로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힘없는 계층에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가장 위대한 도덕적 권위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권력을 가진 계층은 어차피 그 권력으로 눈이 먼 상태이고, 결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그들은 그 권력을 포기해야만 한다.


네 번째로 권력을 가진 계층은 ‘진리 주장(truth-claim)’이라는 그들만의 언어를 통해서 지배력을 더 강화한다. 학계는 “학문의 자유”를, 기업계는 “자유 기업”을, 과학계는 “경험적 객관성”을 그리고 종교계는 “신성한 진리”라는 가면을 쓰고 있다. 그들이 쓰고 있는 이런 가면을 벗겨야 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지배 계층이 장악하고 있는 이런 언어를 전복해야 한다.


다섯 번째로 문화도 사람들처럼 상호교차성으로 인해 구성될 수 있다. 다른 문화보다 더 뛰어나거나 뒤떨어진 문화가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문화조차도 얼마든지 더 나은 문화와 뒤떨어진 문화로 간주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개인의 권리와 개인의 정체성은 핵심이 아니다. 부와 권력을 나누는 사회로 개편하는 데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는 자유주의 사상은 방해가 될 뿐이다.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된 개인의 정체성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고, 오로지 집단 정체성과 집단 권리만이 진짜 중요한 것이다.


성경적 분석 :


첫 번째로 전반적인 주장이 다 말이 안 된다. 다른 거 떠나서 한 가지만 보자. 가장 취약한 계급이 사회를 재편성해서 가장 권력있는 계급이 된다면, 그 계급은 왜 계속 거기 있어야 하는가? 그 계급 또한 다시 축출되어야 할 대상이 아닌가?


두 번째로, 너무 단순하다. 이 관점은 인간을 내재적으로 선하거나 또는 백지 상태로 본다. 그렇기에 인간 속 모든 악은 다 사회로부터 온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이 이렇게 단순한가?


세 번째로, 이런 주장은 인간성 자체를 훼손한다. 포스트모던은 인류 전체를 동등하게 바라보지 않고 대신 인종과 어떤 민족에 속했는가를 더 중시한다.


네 번째로, 그렇기에 이 사상은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진 죄성을 부정한다. 성경은 만연한 죄가 이 세상 전체를 뒤덮고 있다고 한다. 어떤 민족이 또 어떤 문화가 죄를 더 짓거나 덜 짓는 게 아니다. 죄성에 오염된 모든 문화는 예외없이 자신만의 우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은 이런 성경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특정 인종 또는 민족에게 더 죄가 있다는 식의 생각은 얼마든지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을 초래한다.


다섯 번째로 포스트모던은 특정 그룹 간의 용서와 평화 그리고 화해가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이런 시각은 지배(domination)에 치중하게 된다. 언론의 자유 그리고 종교의 자유와 같은 자유주의 가치를 단지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장치로만 파악하는 포스트모던 사상은 사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불의한 상황을 인간 차원에서 벌어지는 현상으로 보고 인간을 악마화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스스로를 구원자로 간주하면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원할 구원자가 가져다줄 정의로운 사회를 기다리지 않는다.


성경적 정의를 다른 대안들과 비교하기


첫 번째로, 오로지 성경적인 정의만이 다른 모든 사고 체계 속에서 발견되는 정의의 문제를 해결하고 제대로 소화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속적인 이론은 앞서 살펴본 성경적인 정의가 가진 다섯 가지 측면의 일부만을 해결할 뿐이다. 그 어떤 이론도 다섯 가지를 다 포괄하지는 못한다.


두 번째로 성경적 정의는 다른 대안들을 무시하거나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각각의 대안적 견해와 모순된다. (a) 성경적 정의는 다른 대안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기초가 탄탄하다. 왜냐하면 도적적인 절대성을 가진 하나님의 성품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대안이 기초로 삼는 것은 바람처럼 흔들리는 인간이다. (b) 성경적 정의는 인간의 상태에 대해 훨씬 더 심도 깊은 분석을 제시한다. 그 결과 불의가 다른 이론들과는 달리 훨씬 더 복잡한 상황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c) 성경적 정의는 현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의 범주에 맞지 않는 부와 소유권의 특성에 대한 독특한 이해를 제공한다.


세 번째로, 성경적 정의에는 지배에 대한 보호 장치가 내장되어 있다. 정의가 구현되려면 무엇보다 모든 개인과 모든 문화에 적용되는 도덕적 절대성이 필요하다. 사회가 만들어낸 진리와 도덕성에 의존할 때 지배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로지 기독교만이 특정 세력의 지배를 전복시킬 수 있는 진리 주장을 제시한다. (a) 기독교는 모든 답을 다 알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얼마든지 미스테리가 존재한다. 이 세상과 인간은 복잡하고 근본적으로 여전히 신비의 대상이다. (b) 기독교는 결코 우리의 주장을 따르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의를 위해서 싸우지만 궁극적으로 정의를 가져다주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 (c) 성경의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 약자의 하나님이다.


네 번째로 오로지 성경적이 정의만이 권력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급진적으로 파괴적인 사고를 가져다준다. 자유주의자까지도 포스트모던이 맹목적으로 지향하는 권력 형성에 대해서 비판한다. 이런 상황에서 오로지 성경적인 정의만이 권력에 대한 바른 이해를 줄 뿐 아니라, 권력의 부패에 대해서도 경계하도록 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는 사회의 가장 밑바닥 계층의 가난한 자로 왔다. 그는 사회적 권력을 가진 엘리트층으로부터 갖은 고초를 당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모든 능력과 특권을 포기한, 자신의 “영광”까지 포기한 하나님을 만난다. 왜? 그는 그런 모습으로 약하고 힘없는 인간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이다(빌 2:5-8). 그리고 그는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다시 부활하셔서 영광을 받으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는 영광을 받으셨다(빌 2:5:9-11). 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위해서 모든 능력을 기꺼이 포기했기에 예수님은 다시 영광을 받으신 것이다.


성경적 권위는 오로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기독교는 결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구분이 필요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기존의 질서를 전복시킨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능력을 다 포기하고 오셨듯이, 우리도 권력에 관해 변화된 태도를 가지게 된다. 


이 세상에 성경적 정의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기독교인은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권을 파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신 기독교인은 자신의 장자권을 높이 들고 정의를 행하여야 한다. 긍휼함을 사랑하고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미 6:8).




출처: https://quarterly.gospelinlife.com

원제: A Biblical Critique of Secular Justice and Critical Theory

번역: 무제

이 세상에 성경적 정의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기독교인은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권을 파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신 기독교인은 자신의 장자권을 높이 들고 정의를 행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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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Tim Keller

팀 켈러(1950-2023)는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MDiv)와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DMin)에서 수학했으며, 뉴욕 맨하탄 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초대 목사로 섬겼다. City to City와 Faith & Work, The Gospel Coalition을 설립하여 교회 개척, 복음 갱신, 복음 연합에 큰 역할을 했으며,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와 ‘팀 켈러의 센터처치’ 등 다수의 책과 수많은 컨퍼런스 강연과 설교를 통하여 복음적 변증가로 자리매김하며 전 세계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