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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제임스 패커, 이 시대의 마지막 청교도
by 신상목2020-07-19

금세기 최고 복음주의 신학자인 제임스 패커(J.I.Packer) 캐나다 리젠트칼리지 명예교수가 향년 93세로 별세했다. 그는 마틴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 등과 함께 20세기 복음주의 대표적 신학자로 꼽히는데, 4년 전 황반변성으로 인한 실명 이후 천국을 향한 여정을 준비해왔다.


패커 교수는 영국 성공회 소속 목회자를 지냈고 이후 캐나다에서 활동했다. 90여 년 생애 중 70년을 저술 활동과 교수로 사역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것과 기도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의 연합이 주된 신학적 주제였다. 그는 교회를 향해서 회개와 거룩을 촉구했으며, 성령 안에서의 동행과 자신의 내밀한 죄와의 투쟁을 강조했다. 또한, 성경적 권위를 지키는 데에도 힘썼다.


패커 교수는 자신을 ‘사람들을 진리와 지혜의 오래된 길로 부르는 목소리’로 지칭했는데, 이것은 새로운 것을 중시하며 최신 것은 다 옳다는 식의 현대적 가치관에 대한 의식적인 저항이었다.


1926년 7월 22일 영국 글로체스터시어 북부 트위닝 마을에서 태어난 패커 교수는 성공회 신앙을 가진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다. 성공회 배경에서 자랐지만 한동안 그는 명목상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7세 때 사고를 당해 뇌수술을 받기도 했는데 그 상처 부위가 눈에 띌 정도로 평생 흉터가 남았다.


1944년 옥스퍼드 코퍼스크리스티칼리지에 진학한 그는 기독학생회가 주관한 저녁예배에 참석하면서 그의 인생을 그리스도에게 헌신하게 된다. 세인트알데이트교회에서 접한 복음적 설교를 통해 그는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도전을 받았다. 그는 찬송가 ‘내 모습 이대로’를 부르면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내 모습 이대로’는 어릴 적 사고로 인한 흉터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사고를 하나님의 섭리로 여기고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옥스퍼드에서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하면서 고전학에 심취하게 된다. 그 무렵 패커 교수는 옥스퍼드의 내부 기독인연합회에 기증된 옛날 책을 정리하다가 16, 17세기 기독교 고전을 분류하는 일을 맡았다. 이때 먼지 쌓인 지하실에서 17세기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의 저작들을 만난다. 그는 거기서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와 ‘죄 죽임’을 읽으며 청교도 신앙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 만남을 통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고하게 믿는 신앙인이 됐다. 그는 나중에 사람들에게 자신을 현대판 청교도로 생각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가 저술한 ‘청교도 사상’은 청교도 신앙 입문서로서는 최고의 책으로 청교도와 성경, 복음, 성령, 생활, 목회 등을 종합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청교도들의 비전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소개하면서 그들이 실생활에서 발휘했던 적극적인 능력과 함께, 그들에게 대조적으로 명성은 주어지지 않았음을 서술하고 있다. 패커 교수는 청교도들의 사상과 가르침을 소개하면서 비전을 잃어버리고 도덕적인 방종 속에 살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치료제’를 제공했다.


패커 교수의 첫 논문은 ‘믿음에 의한 칭의의 청교도적 논의’(1952)였다. 앞서 1948년 옥스퍼드대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그는 런던의 오크힐신학교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 교사로 강의를 시작했다. 1948-1949년에는 매주일 저녁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당시 50세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들었다. 패커 교수는 로이드 존스의 설교에 탄복하게 되는데 그 이전까지는 한 번도 그런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마치 전기쇼크를 당한 것 같았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패커 교수와 존스는 서로 알게 되면서 가까워졌고 패커 교수는 존스에게 청교도적 관점을 이해시키고 적용하는 정기 모임을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20년간 지속된 ‘청교도 콘퍼런스’의 시작이었다. 이후 패커 교수는 옥스퍼드대 위클리프홀에서 성직 서임을 연구했고 1952년 성공회 부제로, 1953년 버밍햄성당 사제로 안수를 받았다. 1954년 그는 옥스퍼드대에서 ‘청교도 리처드 백스터 연구’로 400쪽 짜리 논문을 제출했고 석사 학위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그의 박사 논문은 너무 길어서 그 이후부터 옥스퍼드대에서 박사 학위 논문 글자 수를 제한했다고 한다.


패커 교수는 그 해 간호사였던 키트 뮬렛과 결혼하고 루스, 나오미, 마틴 등 세 자녀를 입양했다. 1955년 브리스톨로 이주한 패커는 틴데일홀에서 6년간 강사로 사역했다. 여기서 그는 ‘케직’이란 제목의 개혁주의 칭의 교리 논문을 저술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펠라기우스주의를 비판하며 이신칭의 교리를 수호했다. 이는 패커 교수가 격론을 벌인 주제로 개인적 신앙 경험과 목회자의 마음에서 비롯됐다.


칭의와 관련해서는 1986년 ‘칭의의 여러 얼굴들’ 등을 펴내고 ‘오직 믿음’이라는 종교개혁의 교리를 수호했다. 그는 “끊임없이 이신칭의에 대한 오해가 있고 반대하는 의견이 있으며 형태가 왜곡되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신의 죄인 됨에 대해 무엇인가를 아는 자들에게는 이 교리가 진실로 생명줄이자 송영이며, 찬양의 외침이자 승리의 노래”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을 1958년에 출간했는데 이는 그의 첫 번째 책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개신교의 역사적 위치를 서술했다. 당시 팽배하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답변이자 변증의 성격을 띤 이 책에서 패커 교수는 확고한 성경무오를 설파하는 것을 비롯해, 성경 말씀이 고차원적인 하나님의 진리임을 힘있게 제시했다.


흔히 근본주의라 할 때 좁은 의미로 우파적 기독교제국의 관점으로만 인식되고 있는데, 패커 교수는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 크리스천의 역사와 신학적 유산의 공통점을 서술하는 데 중점을 뒀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균형 잡힌 성경 해석과 합리성, 역사적 맥락 등을 기반으로 설명했다. 이후 펴낸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계시와 성경’(1965), ‘하나님은 말씀하셨다’(1979) 등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패커 교수는 1960년대 격월간 ‘복음주의 매거진’의 시리즈물로서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안내하는 연속 기고문을 썼다. 나중에 이 기고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판됐는데, 이 책이 50만부 이상 팔리며 그는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다. 패커는 이 책에서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오늘의 교회를 약화시키는 뿌리가 된다”고 썼다.


패커 교수는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하기도 했다. ‘복음주의와 하나님의 섭리’(1961)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책임 사이의 긴장을 성경 속에서 반추하도록 했다. 이 문제는 오랜 역사 속에서 신학과 철학이 논쟁을 벌였던 지점이기도 하다. 패커는 이를 명료하게 설명했는데 복음 전파와 기도, 고난 등의 주제를 다루면서 풀어냈다.


1977년 패커 교수는 R.C.스프로울, 존 게르스트너, 노먼 가이슬러, 그레그 반센 등과 함께 미국에서 콘퍼런스를 열고 국제성경무오협회를 구성한다. 이는 1978년, 성경은 무오하다는 시카고 선언을 이끌어내는 기초가 됐다. 패커 교수는 1979년 캐나다 밴쿠버의 리젠트칼리지로 자리를 옮겨 사역하다 1996년 은퇴했다. 은퇴 이후에도 명예교수로서 강의와 강연 등을 이어갔다.


패커 교수는 종종 자신이 영향을 받은 기독교 고전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의 추천 목록에는 장 칼뱅의 ‘기독교 강요’, J.C.라일의 ‘거룩’, 존 번연의 ‘천로역정’, 리처드 백스터의 ‘참된 목자’, 마르틴 루터의 ‘의지의 노예에 대하여’, 그리고 존 오웬의 저작들이 있다.


이 중에서 그가 가장 좋아했던 고전은 ‘천로역정’이었다. 패커 교수는 천로역정을 매년 한 번씩 읽었는데 2016년 그가 시력을 잃을 때까지 읽었다. 일반 도서도 즐겨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가장 좋아했고 미스터리물과 탐정 소설류도 자주 읽었다. 특히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은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패커 교수가 후반기 생애에서 공헌한 사역 가운데 하나는 ESV(the English Standard Version) 성경 편찬이었다. 미국 일리노이주 휘튼 소재 크로스웨이북스 출판사 레인 데니스 박사는 패커를 새로운 성경 번역을 위한 총괄 편집자로 초청했고 패커는 여기에 부응했다. 성경 이름인 ESV도 패커가 직접 제안한 것이다. 이 성경은 현존하는 성경 중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영어로 직역한 최고의 성경으로 꼽힌다. ESV스터디바이블은 칼뱅의 개혁신학을 충실하게 반영한 연구 성경으로도 알려져 있다.


패커 교수의 마지막 사역 여정은 교회가 교리문답을 회복하도록 돕는 일이었다. ‘그리스도인 되기: 성공회 교리문답’은 그 정점이었다. 패커 교수는 삶 속에서 구약의 ‘전도서’를 통해 지혜를 얻기도 했다. 젊은 시절 한때 냉소주의에 빠졌던 그는 전도서를 읽고 치유됐다고 고백했다. 그는 “전도서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주관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어리석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책”이라며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모든 지혜를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교회에 대해 “개혁교회는 은혜의 교리와 은혜의 삶을 재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교회 안의 개인주의는 모두 제거해야 한다”며 “하나님의 목적은 주님의 영광을 기념하는 교회 자체에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현대 교회를 향해 네 개의 영어 단어로 권면했다. “모든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십시오”(Glorify Christ every way).


미국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 D.A.카슨 교수는 하나님의 말씀 수호,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중요성, 청교도 신학의 재발견 등이 패커 교수가 남긴 유산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현대판 청교도이자 마지막 청교도로서 그가 보여준 보수적 복음주의는 적어도 서구 교회에서는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동성결혼을 반대하면서 캐나다 성공회를 탈퇴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패커 교수는 캐나다성공회(ACC)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ACC는 자유주의 신학 노선을 추구했다. 그는 세인트존스교회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 교회는 교단의 신학 성향과는 전혀 달랐다. ACC는 동성결혼을 찬성했을 뿐 아니라 성직자 수임 후보자도 동성애자를 받아들였다. 이에 세인트존스교회는 토론과 논쟁을 거쳐 ACC를 탈퇴했다. 세인트존스교회가 ACC를 탈퇴했을 당시 교회의 재산은 교단법에 따라 몰수당했다.


패커 교수는 2008년 자신의 뉴웨스트민스터 주교 면허를 포기했다. 보수 복음주의자들은 패커의 용기 있는 행동에 갈채를 보냈다. 카슨 교수는 “패커 교수가 논쟁적 위치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거인들’이란 청교도적 유산에 속하지 않았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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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신상목

신상목 기자는 국민일보 미션영상부 부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