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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생각보다 더 깊고 깊은 죄
by Greg Morse2020-07-10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는 시대를 맞았다. 이 말은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어떤 태도나 행동을 “죄”라고 부르려고 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죄라는 단어가 이제는 너무도 구닥다리로 느껴진다. 얼굴을 붉히고 손가락질까지 하면서 기운 빠진 회중들을 향해 죄에 대해 꾸짖는 설교자를 한번 상상해보라.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설교 또는 그런 설교자와 엮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죄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될 때,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도 상실하게 된다. D.A. 카슨(D.A. Carson)은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서 모든 신실한 기독교인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무엇으로부터 우리가 구원받았는지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한,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낼 수는 없다. 죄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궁극적인 이해가 없는 한, 십자가가 무엇을 성취했는지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Fallen: A Theology of Sin,’ 22).


죄에 대한 얕은 생각은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얕은 생각으로 이끈다. 죄가 가진 엄중함을 모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가진 심오한 세계를 맛볼 수 없다.


가짜 그리스도들


죄의 본질에 관해 깊은 사고를 하지 못할 때, 그리스도에 대한 싸구려 이해가 우리 주변을 채우게 되고, 그 가짜들은 각자 나름의 ‘메시아적 메시지’를 제시한다. 


인생 코치 예수. 죄를 출발점으로 보지 않을 때, 또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라고 보게 될 때, 우리는 죽음과 심판 그리고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된다. 대신 불가능한 목표와 거창한 꿈을 성취하도록 돕는 ‘그리스도’에 치중하게 된다. 예수는 이제 착한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이 되도록 돕는 존재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는 인간이 잠재력을 발휘하는 존재로 우뚝 서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가정부 예수. 죄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단지 인간인” 우리가 당연히 저지르는 것으로 죄를 바라보게 된다. 즉, 죄는 애통해야 할 것이 아닌 사소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면 죄는 단지 하나의 실수일 뿐이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어도 이 정도로 고백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 인간이 “악마”는 아니니까. 따라서 예수는 이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우리가 저지르는 ‘사소한 실수’의 뒤처리를 해주는 존재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는 우리의 ‘사소한 실수’를 청소하는 청소비를 내주기 위해서다.  


인본주의자 예수. 죄를 거룩한 하나님과 연결시키지 않고 단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로만 바라보게 되면, 좋은 목적을 가진 대의명분을 아예 궁극적인 명분으로 발전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제 예수는 이런 명분에 필요한 좋은 선전도구로 사용되며, 인간은 죄를 짓는 자와 그 죄로 인해 해를 당하는 자의 관계로 정의된다. 따라서 예수가 이 땅에 온 이유는 우리가 가장 열정을 쏟는 문제인 사회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다. 


내게 임하소서(Kumbaya) 예수. 죄를 우리가 겪는 고통보다 훨씬 더 사소한 것으로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예수를 단지 좋은 느낌을 전해주는 존재로 보게 된다. 예수는 이제 우리의 문제와 스트레스를 들어주고, 이 땅의 새와 꽃에 대해 이야기해주며, 우리를 푸른 초원과 안전한 물가로 인도하는 존재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고통받고 있다.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아는 예수이기에, 그는 굳이 우리에게 상처가 되거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는 어떤 고난을 만나도 우리가 맘 편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다.


왜곡된 그리스도가 주는 위험에서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죄가 무엇이고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에베레스트 산보다 더 높은 우리의 타락과 죄를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서, 인류의 옷장 속에 넣어 놓은 해골과 다시 대면해야 한다. 바로 아담 속에 있는 우리의 원죄다. 그렇게 함으로써 단지 내 자신과 우리 시대가 짓는 죄의 수준을 벗어나 인류의 뿌리를 점거하고 있는, 바로 그 죄의 근원까지 내려가야 한다.


아담의 죄 그리고 우리의 죄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 중에 얼마나 있을까? 또한 그의 죄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이해하도록 준비시키는지를 생각하는 이는 또 얼마나 있을까? 우리가 지은 죄의 역사는 우리 존재보다 앞선다. 우리는 아주 오래 전에 노예의 굴레로 던져졌다. 우리 모두는 다 창세기 첫 장에서부터 죄에 빠진 상태다. 그리고 예수님, 진정한 그리스도가 또한 바로 그 장소에서 약속되었다. 


어떻게 아담의 죄가 곧 우리의 죄가 되는 것일까? 어떻게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롬 5:18-19)가 가능했던 것일까?


다윗과 골리앗의 기념비적 전투를 생각해보자. 블레셋 거인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조롱을 퍼부었다. 이스라엘의 왕이자 거인이었던 사울은 텐트에 숨어있었다. 그때 전혀 알려지지 않은 목동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되는 것을 참지 못했고, 골리앗에게 도전했다. 골리앗이 다윗을 놀리자마자 다윗은 골리앗의 머리를 박살냈고 그의 머리를 잘랐다(삼상 17:51).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이기에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없을 것이다. 왜 다윗과 골리앗, 두 사람만 싸운 거지? 왜 일대일 싸움으로 전쟁의 승패를 가른 거지? 


우리는 골리앗처럼 쓰러졌다


일대일 결투로 전쟁의 승패를 겨룬 마지막이 과연 언제일까? 이것은 바로 최고의 전사, 즉 우리의 “챔피언”이 상대편 챔피언과 죽을 때까지 싸우는 싸움으로 전쟁의 승패를 가르던 고대의 관습이다. 


골리앗은 바로 블레셋의 챔피언이었다.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삼상 17:8–9).


다윗과 골리앗은 대표로, 그러니까 양측을 대표하는 챔피언으로 만난 것이고, 그들의 싸움은 양쪽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었다. 만약에 다윗이 죽었다면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섬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이 쓰러졌을 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우리의 챔피언이 사탄과 결투를 벌였고 그때 아내까지 아담의 곁에 있었지만, 아담은 패배했다. 뱀의 머리를 박살냈어야 했을 아담은 도리어 그의 자손까지 걸려있는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사탄에게 굴복했다. 우리의 대표, 우리의 전사는 그 사악한 뱀의 거짓말하는 혀를 잠재우지 못했고, 대신 자기 자신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중요시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선악과의 열매를 먹었다. 


뿌리에서부터 독에 오염된


인류의 챔피언으로서, 또 창조주와의 언약을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적과 싸운 아담은 쓰러졌고, 그의 자손들은 이제 아담의 타락성과 죄를 모두 다 상속하게 되었다. 아담 때문에 우리는 누구나 다 즐겁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나고, 사랑하며 살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나며, 또한 악을 피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난다. 아담의 후손은 누구나 다 선천적으로 분노의 자식이며, 불순종의 자녀들이고 또한 우리의 조상이 패한 대상인 사탄에게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어버린 상태다(엡 2:1-3). 


우리의 조상 아담 때문에, 우리의 신세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가 되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예 17:9)는 상태가 된 것이다. 우리는 다 죄 중에서 태어난다(시 51:5). 


우리의 죄가 단지 우리 자신의 정욕과 교만함 그리고 거짓말하는 혀, 하나님의 영광을 바꾸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아담에게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챔피언은 적의 피를 흘리게 하는 대신에 무릎을 꿇었고, 달콤한 선악과를 깨물었기 때문에 그의 자손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저주의 쓴맛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중생하지 않은 삶을 사는 동안에 수도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사탄과 맺은 동맹을 확인할 수 있다. 인류라는 나무는 뿌리에서부터 독에 오염되었다. 


두 전투 이야기


이 모든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그를 향하도록 한다. 동화 속 요정 예수, 정치적 활동가 예수, 집을 치워주는 예수가 아닌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다. 첫 번째 아담은 궁극적으로 진짜 챔피언이 와서, 아담의 머리를 잘라버린 바로 그 적과 제대로 싸우기 위한 하나의 설정이자 복수를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롬 5:14). 


이 세상에 죄가 한 사람으로 왔던 것처럼(롬 5:12), 용서도 다른 이를 통해서 온다(골 1:14). 아담의 범죄가 모든 이에게 죽음을 가져다줬다면(롬 5:15), 예수님의 승리는 그를 믿는 모든 이에게 영생을 가져다준다(롬 5:17). 아담은 그의 자손을 저주와 타락으로 밀어넣었고 또한 그들을 사탄과 죄의 노예로 만들었지만, 두 번째 아담은 아버지를 위해 그의 형제들을 해방시켰고, 거룩함 안에서 그들에게 그의 온전한 은혜와 신령한 도움을 준다(롬 5:16). 


에덴동산에서의 전투 때문에 세상은 저주받았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벽 밖에 있는 겟세마네에서 벌어진 전투로 인해서 구원받은 모든 이들은 이제 축복을 받게 되었다. 우리의 첫 번째 챔피언은 세상과 육욕 그리고 사탄에 의해 박살났지만, 우리의 진짜 챔피언은 이 세상과 육욕 그리고 사탄을 박살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그의 백성을 위해서 죽음을 이겼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다 노예고 하나님의 적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고 또한 앞으로 맞게 될 세상에서 우리는 다 왕과 왕비가 될 것이다.


우리가 죄의 혈통을 잊을 때, 또 우리가 아담이 가져다 준 타락 때문에 죄 속에서 태어나 사탄을 따르는 자였다는 사실을 잊을 때, 우리는 죄를 ‘가벼운 실수’ 정도로 여기고 서로의 상처를 너무도 쉽게 치유한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필요는 우리의 행위 수준에 따라서 달라지며, 또한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를 입을 수도 있다는 무서운 생각에 지식적으로 또는 기능적으로 유혹받기도 한다. 그러나 죄의 우물은 너무도 깊다. 우리의 죄는 너무도 오래되었고 우리의 노예 생활은 너무도 끔찍하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또 다른 전사가 필요했다. 다른 아담이 필요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이 세상을 다스린다. 그리고 그는 곧 다시 오실 것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Your Sin Runs Deeper Than You Think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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